남북적 회담에 거는 미국의 기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워싱턴=김영희 특파원】미국이 남북적십자회담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난 11일 「로저즈」국무장관에 의하여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로저즈」장관은 그날 국무성 기자실에서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8월 30일 평양에서 막을 열게 된 것을 환영한다는 말로 회견을 시작했다. 「로저즈」장관은 적십자회담이 성공하여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적대행위를 제거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로저즈」장관의 그와 같은 자발적인 발언은 적십자회담 같은 남북협상에 걸고 있는 미국의 희망과 기대를 적절히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미국이 기대하는 긴장완화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동북아지역 전체를 말한다.
「마셜·그린」국무차관보는 7월 11일 남북한대화의 결과로 강대국의 세력이 마주치는 지역에서 긴장완화에 진전을 보고있다고 말한바 있다.
흔히 미국이 한국의 긴장완화를 바라는 동기를 논할 때 「닉슨·독트린」의 실천을 예로 든다. 「닉슨·독트린」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관해서는 아직 일정한 정의가 내려진바 없지만 「아시아」대륙으로부터 미국의 군사적인 존재를 철수시킨다는 것이「닉슨·독트린」의 초보적인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닉슨」취임 후 지금까지의 장기적인 미국의 「아시아」정책을 돌아보면「닉슨·독트린」은 그것 자체가 최종목표가 아니라 중공·소련과의 관계개선, 일본의 새로운 역할담당을 통한 동북아일대의 전반적인 세력관계의 재정비를 위한 필요 불가결한 포석으로 볼 수가 있다.
「마셜·그린」이 한국을 강대국의 힘의 심장부라고 표현했을 때 그는 단순히 남북협상에 대해 한국에서의 「닉슨·독트린」실천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한국에 밀접한 이해관계를 갖고있는 4강의 세력관계를 냉전체제에서 협조체제로 개편하는데 필요한 분위기 조성까지 기대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지난 2월 「닉슨」대통령의 북경방문을 앞두고 한반도의 긴장완화 없이 미국 중공관계의 정상화가 가능할 것이냐는 논의가 활발했다.
「컬럼비아」대학의 「브르진스키」교수, 「브루킹즈」연구소의 「모튼·핼퍼린」박사 등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때 한반도의 긴장완화없이 미국·중공관계의 개선이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지만 완전한 관계정상화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전문가들은 평양-북경-「모스크바」삼각관계 때문에 중공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미·중공관계 정상화를 병행시키기를 바란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친 주은래의 발언으로 뒷받침되었다.
특히 「로저즈」장관 「무어러」합참의장 같은 미국의 고위관리들이 「닉슨」중공방문 이후 북한에 대한 태도를 조금씩 긍정적으로 전환하고 북한도 미국에 「철소공세」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중공의 입김을 느낄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미국과 중공이 남북협상에 공동으로 걸고 있는 이해관계 때문에 적십자회담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7월 발표된 남북비밀협상이 미국의 작용하에 성사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낳았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공식발언이나 한국기자 상대의 발언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기자들과의 사담에서도 남북협상은 한국의 「이니셔티브」로 성립된 것이라고 강조하고있다.
최근 어느 고위관리와 이 문제에 관해 사담을 가진 저명한 미국기자는 자기는 그 관리가 말한 한국주도하의 남북협상설을 믿는다고 말했다.
미국관리들은 대체로 적십자회담의 성과를 낙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남북비밀협상이나 적십자회담이 당장 통일을 가져오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들이 회담의 앞날을 낙관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적십자회담의 목표가 통일에는 훨씬 미달하는 한정된 목표를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 있는 것은 미국관리 중에서도 하급관리보다 고위관리들의 견해가 더욱 낙관적이라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그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차이, 다시 말하면 고위관리일수록 남북협상에 관한 보다 많고 장기적인 정보에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회담의 앞날을 점치는 의미심장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
남북협상의 진전이 미국·소련, 미국·중공, 일본·중공관계 같은 주변정세에 한편으로는 영향을 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전제할 때 이달 말 평양에서 역사적인 막을 올리는 적십자회담의 진로가 결국 동북아일대에 일고있는 세력개편바람과 긴장완화, 정상화된 미국·중공관계를 토대로 하여 미국·일본·중공·소련간의 힘의 관계를 개편하는 것인데 남북한 적대관계의 해소와 한반도의 긴장완화는 이 세력개편에 접착제가 되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