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층민들 신분 상승 봇물 … 재상 반열 오르기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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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호 26면

충남 천안의 광덕사 앞에 있는 호두(胡桃) 시식비(始植碑오른쪽 아래)와 400여 년 된 호두나무. 유청신의 경제적 기반이 천안이어서 이곳에 처음 호두나무를 재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용철 기자

일제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역사가 안확(安廓)은 『조선문명사』(1923년)에서 고려의 ‘귀족정치시대’를 움직인 세 집단은 승려, 무신, 폐신(嬖臣)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폐신이란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말한다. ‘폐신’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뜻이며, 폐행(嬖倖)이라 부른다. 이들의 행적을 따로 기록한 것이 『고려사』 폐행 열전(권123)이다.

고려사의 재발견 원나라 간섭기와 민초(民草)

폐행 열전엔 주로 원 간섭기에 활동한 55명의 인물이 실려 있다. 출신이 밝혀진 인물 가운데 문·무반 출신 관료는 5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제외하면 평민(15명), 천민(10명), 상인(2명), 승려(3명), 외국인(7명) 등 미천한 신분이 많다. 사회 밑바닥의 민초(民草)들이 원 간섭기에 국왕 측근이 되거나 지배층으로 진출한 사실은 신분제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원 간섭기를 우리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역사의 하나로 여긴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90년 전에 민초들의 지배층 진출에 주목한 역사가 안확의 안목은 실로 신선하고 놀랍다. 억압과 규제만 받아온 민초들에게 원 간섭기는 기회와 희망의 시기였다.

고려 건국 때 반기 든 지역 주민 차별
민초들의 신분 상승을 주도한 계층은 부곡인(部曲人)이다. 이들은 신분상 양인이지만 군현(郡縣)에 거주한 일반 농민에 비해 차별을 받아 사실상 노비와 비슷한 처지였다. 한마디로 신분과 현실의 처지에서 양인과 천인의 두 경계를 넘나든 ‘경계인(境界人)’이었다. 이들의 일부가 각종 사회적 규제와 통념을 극복하고 지배층으로 편입된 사실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박구(朴球)는 울주(蔚州:울산) 소속의 부곡인이다. 조상은 부자 상인[富商]이었다. 그 역시 큰 부자[요재(饒財)]로 알려졌다. 원종(元宗) 때 상장군(무반 최고직:정3품)이 되었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 부사령관으로, 사령관 김방경과 함께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재상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종2품)가 되어 합포(지금의 마산)를 지켰다. 찬성사(贊成事:정2품)의 관직에 있다가 죽었다. 박구는 다른 기능은 없고 전쟁에서 공을 세워 귀하게 되었다.”(『고려사』 권104 박구 열전)

박구(?∼1289년)가 원종(1259∼1274년 재위) 때 무반 최고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고종(高宗:1214∼1259년 재위) 때 처음 군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몽골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출세의 길로 들어섰다는 얘기다. 1274년(충렬왕 즉위연도) 원나라 출신 공주(충렬왕비)가 고려로 올 때 그는 공주의 호위 군사를 맡을 정도로 충렬왕의 측근이었다. 1281년 5월 고려군 부사령관으로 제2차 일본 정벌에 참전했다. 부곡인이 재상 자리까지 오른 것은 박구가 처음이다.

부곡인은 향(鄕), 부곡(部曲), 소(所), 장(莊), 처(處)라는 특수 행정구역에 거주하던 주민이다. 이 중 향과 부곡은 통일신라 때 처음 생겨난 행정구역이다. 인구·토지 규모가 작아 군이나 현이 되지 못한 지역을 주변의 군·현에 소속시킨 소규모 행정구역이다.

“지난 왕조(고려) 때 5도와 양계(함경도·평안도)에 있던 역과 진에서 역을 부담한 사람[驛子와 津尺]과 부곡인은 모두 태조 때 반기를 든 사람들이다. 고려 왕조는 이들에게 천하고 힘든 일(賤役)을 맡게 했다.”(『조선왕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己巳일 조)

위 기록과 같이 고려 정부는 후삼국 통합전쟁 때 왕조에 반기를 든 주민을 향·부곡 지역에 소속시키거나, 소(所)·장(莊)·처(處)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만들어 일반 농민들과 차별하고 특별한 역(役)을 지게 했다. 향·부곡의 주민은 국가 토지 경작, 소 주민은 수공업 생산, 장·처 주민은 왕실·사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역을 각각 부담했다. 부곡인은 일반 조세 외에 이런 역을 추가로 부담해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게다가 다른 곳으로 허가 없이 거주지를 이전할 수 없으며, 대대로 특정의 역을 세습해야 했다. 그들은 관리가 되더라도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부곡인이 이런 규제와 제약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무신정권 때다. 무신 권력자들이 불법으로 남의 토지를 빼앗고 공물을 지나치게 많이 수탈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하층민이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런 저항운동을 주도한 계층이 부곡인이다. 최씨 정권의 권력자 최의(崔竩)가 1258년 피살되고, 이듬해 몽골과 강화(講和)를 맺는다. 몽골의 압력으로 1270년 개경으로 환도(還都)했지만, 그에 반발한 삼별초의 난은 1273년에야 진압됐다. 이후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이런 현실은 부곡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원나라는 고려 국왕 임명권을 장악해 내정을 간섭했다. 고려 국왕과 원나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 국왕이 되었다. 원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후 책봉된 국왕은 국내 정치 기반이 취약해, 원나라에서 자신을 보좌한 측근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쳤다. 국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측근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형태의 궁중정치가 유행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지배층이 권문세족(權門勢族)이다. 일본 원정과 내란 진압 등 전쟁을 통해 무공을 세운 사람, 원나라 말에 능통한 역관(譯官), 원나라 왕실의 환관(宦官)이나 공주 집안 사람 등 대체로 4가지 경로를 통해 진출한 인물들이 주류였다. 원 간섭기라는 새로운 시대 변화에 편승해 앞에서 말한 부곡인 박구도 충렬왕의 측근이자 재상이 되었다. 몽골어에 능통한 역관으로 출세한 부곡인도 있었다.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인 유청신의 공적을 기린 비.

“유청신(柳淸臣)의 처음 이름은 비(庇)다. 장흥부에 소속된 고이(高伊)부곡 출신이다. …나라 제도에 부곡인은 공을 세워도 5품을 넘을 수 없다. 유청신은 몽골어를 잘해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잘 처리했다. 이 때문에 충렬왕의 사랑을 받았다. 충렬왕은 특별히 교서를 내려, ‘유청신은 조인규를 따라 힘을 다해 공을 세웠다. 비록 그는 5품에 머물 수밖에 없으나, 그에겐 특별히 3품의 벼슬을 내린다’고 했다. 또 그의 출신지 고이부곡을 고흥(高興)현으로 승격했다.”(『고려사』 권125 유청신 열전)

부곡인은 5품 이상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유청신(?∼1329년)은 일본 원정과 원나라 내안(乃顔)의 반란 때 양국 사이의 통역 업무를 잘 처리한 공을 인정받아 1287년(충렬왕 13) 8월 규정에 없는 대장군(종3품)으로 승진한다. 1297년(충렬왕 23)엔 재상 자리에 오를뿐더러 충선왕의 측근이 돼 원에 있던 충선왕을 대신해 국내 정치를 전담한다.

縣 승격으로 부곡집단 해체 가속화
박구와 유청신이 재상 반열에 오른 것처럼 원 간섭기에 부곡인들을 속박했던 규제는 상당 부분 무력화됐다. 나아가 유청신의 출신지 고이부곡은 고흥현으로 승격되었다. 지배층 진입에 만족하지 않고, 출신지를 현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박구·유청신과 같이 고위직은 아니지만 원나라에서 환관·군인이 된 부곡인의 출신지가 군현으로 승격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1335년(충숙왕 4) 원나라에서 온 상호군·안자유 등은 고려 국왕에게 (원나라) 황후의 명령을 전했다. ‘영주(永州:경북 영천) 이지은소(利旨銀所)는 옛날엔 현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나라 명령을 어겨 현을 없애고, 주민은 은을 세금으로 바치는 은소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곳 출신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 (원나라) 궁궐에 근무해 공을 세웠으니, 그들 고향을 다시 현으로 승격하라’라고 했다.”(『졸고천백』 권2 영주이지은소승위현비(永州利旨銀所陞爲縣碑))

원나라 환관으로 활약한 나수 등의 요청에 따라 이지은소가 현으로 승격됐는데 이 사실을 기념해 당대 최고 문장가 최해(崔瀣)가 지은 비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부곡 지역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려 했을까? 현으로 승격되면 이지은소 주민들이 은을 채취해 국가에 바치는 고된 역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곡의 해체는 국가 수취와 재정 제도의 해체로 이어질 수 있는 큰 변화를 낳았다. 스스로의 신분 변화에 만족하지 않고 부곡인은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켜 출신지 주민들의 부담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도 부곡 집단의 해체가 하나의 대세였음을 알려준다.

“충렬왕 때 가야향(加也鄕) 출신으로 군인이 된 김인궤(金仁軌)가 공을 세워 그의 고향이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 때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 덕산(德山)부곡은 재산현(才山縣)이 되었다. 충혜왕 때 환관인 강금강(姜金剛)이 원나라에서 수고한 공으로 그의 고향 퇴관(退串)부곡이 나성현(柰城縣)으로 승격되었다.”(『고려사』 권57 지리2 안동도호부조)

지금의 안동에 소속된 부곡인들이 고려와 원나라에서 군인·옹주·환관 등으로 출세한 뒤 자신의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다. 부곡인의 신분 변화에서 부곡집단의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잘 말해준다.

이런 변화가 왜 고려 후기에 집중됐던 것일까? 무신정권의 수탈, 부곡인과 하층민의 봉기, 몽골과의 전쟁, 원나라와의 교류 등으로 고려 후기사회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부곡인은 그런 변화에 편승하여 계층 분화를 촉진시켰다. 계층 분화는 군현 승격 이후 부곡지역을 해체하는 현상으로 발전되었다. 왜 우리 역사는 이런 민초들의 역사에 무관심했을까? 원나라의 간섭과 지배층의 움직임에만 눈을 맞추어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물론 역사의 다양한 모습을 놓치게 된다. 역사 공부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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