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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후배 먼저 태극마크 … 이게 피눈물이구나 … 흙바닥 누워 엉엉 울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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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 광진구에서 만난 이영표는 “대학 때 축구가 생각대로 되지 않아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영표(36)는 1999년 신데렐라처럼 등장했다. 올림픽 대표로 뽑히더니 몇 달 후에는 성인 대표로 발탁됐다. 99년 6월 멕시코와의 데뷔전에서는 헛다리짚기로 상대를 농락해 팬들을 놀라게 했다. 그 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2006 독일 월드컵, 2010 남아공 월드컵까지 10년 넘게 대표팀의 왼쪽을 지키며 127경기에 뛰었다(A매치 최다 출장 3위). K리그 안양(현 FC 서울)을 거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독일 분데스리가 등 빅리그 명문 팀에서도 제 몫을 했다. 쉬지 않고 지평을 넓혀가며 성장하는 그를 볼 때면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영표는 왜 그렇게 승승장구 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축구를 시작해 26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난달 은퇴한 그를 지난 21일 만났다. 그의 성공 뒤에는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다.

- 은퇴가 어색하지 않나.

 “지금까지는 시즌을 마치고 쉬는 것 같다. 내년 2월이 돼도 훈련을 안 하면 이상할 것 같다. 7년 전 독일 월드컵 전후로 은퇴에 대한 생각을 처음 했고, 축구가 없는 삶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컨디션이 어제까지 괜찮다가도 갑자기 확 떨어질 수 있다’고 선배들이 말하더라.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때부터 1년씩 단기 계약을 했다. 나는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동료들은 그런 기미를 눈치채지 못할 때 물러나고 싶었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 선수마다 전성기가 있다. 언제였나.

 “전성기라기보다는 경기를 하다 보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양 팀 선수 22명과 감독·코치·관중까지도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듯한 경기다.”

 - 어떤 경기가 그랬나.

 “에인트호번(네덜란드)에서 몇 경기, 토트넘(잉글랜드)에서 몇 경기, 독일에서 몇 경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몇 경기 등 10경기 정도 된다.”

 - 어린 시절은 어땠나.

 “강원도 홍천 내면, 버스가 하루 한두 대밖에 안 다니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안양으로 이사왔는데 야채를 돈 주고 사먹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야채는 그냥 밭에서 뽑아먹는 것이니까. 한 학년에 반이 26개나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 안양으로 왜 이사했나.

 “어머니가 결정했다. 농사짓고, 결국 땅주인한테 다 주고 나면 이삼십 년을 살아도 미래가 없다고 하셨다. 난 3남3녀의 막내다. 누나와 형들이 서울과 인천 등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막내라 귀여움 받고 자랐다.”

 - 개인 훈련을 열심히 했다고 들었다.

 “중 1부터 대학교 4학년까지 10년간 했다. 중학교 때는 야간에 드리블 연습을 많이 했다. 고등학교 때는 팀 아침 훈련(6시 반) 하기 한 시간 전에 나와 산을 뛰었다. 겨울에는 추워서 울면서 뛰었다.”

 - 안양공고 시절은 어땠나.

 “축구부 숙소에서 단체 생활을 했다. 새벽 5시 개인 훈련하고, 6시반부터 팀 훈련을 한다. 숙소로 돌아와 상을 차리고, 밥 먹고 설거지한다. 오전 수업에 들어가면 피곤해서 잠들 때가 많았다. 오후에 밥 해먹고, 오후 3시부터 두 시간 훈련한다. 다시 밥 차려먹고 설거지하고, 개인 훈련을 오후 8시부터 했다. 난 그때 줄넘기를 했다. 사이사이 숙소에서 청소하고, 틈틈이 선배들에게 맞기도 했다.”

 - 동료들도 대부분 개인 훈련을 했나.

 “그렇지 않다. 고3 초에 난 6군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고 건국대 입학이 확정됐다. 그리고 주장이 됐다. 동료들은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시즌 두 번째 대회까지 성적이 나빴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3개월 동안 단체로 줄넘기를 시켰다. 손가락으로 일일이 얼굴을 찍어보며 땀이 났는지 검사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땀을 쫙 빼야 했다.”

 - 3개월 하니까 성과가 있었나.

 “안양공고는 당시 중하위권이었다. 그런데 3개월 단체로 줄넘기를 한 뒤 6월 KBS 추계대회, 8월 백록기에서 2관왕을 했다. 그 다음 바로 단체 훈련을 없앴다. 난 고1 때부터 줄넘기를 계속 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줄이 닳아서 끊어진 적도 있다. 2단 줄넘기를 처음에는 100개를 한 뒤 숨차서 더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2단을 쉬지 않고 1000개나 했고, 3단 뛰기를 추가로 100개 더 할 수 있었다. 그때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느꼈다.”

 - 단체 구타 사건도 있었다던데.

 “후배를 때린 게 아니라 3학년 동료를 때렸다. 주장을 맡은 뒤 후배들은 말을 듣는데 동기들이 문제였다. 감독님이 자리를 비우고 우리끼리 훈련하는데 동료들이 건성으로 했다. 훈련을 30분 만에 취소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1, 2학년은 놔두고 3학년만 나오라고 했다. 보통 후배를 때리지 친구끼리는 안 때린다. ‘빠따’를 치겠다고 하자 친구들이 ‘왜 맞아야 하느냐’고 항의하더라. ‘이유는 맞은 다음에 들으라’고 맞섰다. 끝내 때리고 나서 ‘열심히 안 해서 때렸고,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들이 너무 착했다. 하여튼 그 이후부터 훈련 분위기가 잡혔고 성적도 잘 냈다. 한동안은 내가 그렇게 한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잘못된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 그 덕분에 우승도 했고, 그 친구들도 대학에 가지 않았나.

 “누군가를 때려서 제압하는 건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길게 봤을 때는 좋은 게 아니다. 나중에 사과했다.”

 - 언제 제일 힘들었나.

 “대학 때 축구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다. 한동안 매일같이 벤치에 앉아 뉘엿뉘엿 해가 지는 걸 30분씩 바라보며 별 생각을 다 했다. 불면증에 고생하고, 잠들면 가위에 눌렸다. 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강철로 두께가 3m쯤 되는 것 같은,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벽 같았다. 나중에는 그 벽이 나를 밀어서 후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밀리지만 말고 여기서 버티기만 하자고 생각하며 참았다.”

 - 그게 극복이 됐나.

 “대학 4학년 때 주장이 됐다. 그때 건국대에서 신병호·허제정·윤용구 등 올림픽 대표가 6명이 나왔다. 동료는 다 대표인데, 나는 한 번도 안 됐다. 어느 겨울 밤, 그날도 혼자 운동장에 나와 개인 훈련을 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숙소에는 애들이 따뜻한 곳에서 재밌는 TV를 보고 있다. 난 열심히 하는데 국가대표는 안 되고 심지어 후배까지 대표가 됐구나. 난 주장인데, 할 말이 없구나. 이건 좀 아니다. 어렸을 때 열심히 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어른들 말에 속았구나. 소풍도 못 가고, 엄마가 해준 밥도 못 먹고, 단체로 30인분씩 짓는 떡 같은 밥만 먹어가며 10년간 흘린 땀이 헛것이구나’. 차디찬 흙바닥에 누워 달을 보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졌다. 이게 피눈물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엉엉 울었다. 그런 눈물을 흘리고 몇 주 후에 올림픽 대표팀 테스트에 뽑혔다. 1주일 만에 테스트에 합격하고, 약 3개월 후에는 A매치 국가대표가 됐다.”

 - 짧은 순간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올림픽 대표팀 테스트로 울산에서 명지대와 연습경기에 뛰었다. 내 인생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반에 내 실수로 골을 먹었다. 축구인생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프타임 때 허정무 감독님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서울에 뭐 타고 올라가나 생각하고 있는데 감독님이 부르더니 “너 뭐해? 안 들어가?”라고 하셨다. 온몸의 세포가 새로 태어나는 듯했다. 이게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고, 왼쪽 공간을 초토화시켰다.”

 - 성공했다고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

 “솔직히 그런 걸 한 번도 못 느꼈다. 스스로에 대해 늘 부족하고 실망했던 기억만 난다. 그러다 어느 날 깜짝 놀랐다. 토트넘에 가서 첫 시즌 32경기, 두 번째 시즌 31경기, 세 번째 시즌 30경기를 뛰었다. 그때 토트넘 왼쪽 측면에는 베일(웨일스), 질베르투(브라질), 지글러(스위스), 에코토(카메룬), 크리스(아일랜드) 등 각국 대표 윙백만 6명이었다. 한번은 어떤 기자로부터 ‘어떻게 이영표 선수는 늘 올라가기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멍해졌다. 되돌아보면 난 중요한 순간마다 실패했고, 좌절했다. 힘들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했는데 어느 순간 되돌아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냈더라.”

 - 스스로에게 엄격하면 매사가 불안하지 않나.

 “아무것도 없을 때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성이 쌓이니까 불안해졌다. 꿈꿔왔던 톱리그에서 뛰면 더 재미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경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경기하러 가는데 버스가 굴러서 6주 정도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까 돈이었다. 돈을 받지 않고 축구 할 때는 좋았다. 돈을 받으면 경기의 목적이 승리가 된다. 최선을 다하고 즐겁게 준비하는 건 내가 할 수 있지만 승리는 내 맘대로 안 된다. 내 맘대로 안 되는 걸 하려니까 불안한 것이다. 주위의 시선도 너무 의식했다. 처음에는 칭찬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에 대한 비난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난 남들의 칭찬을 즐기고 있었다.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 이후에 남들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 혈기왕성한 시절을 적당히 즐기는 동료들이 부럽지 않았나.

  “와이프가 태어나서 처음 사귄 여자였다. 운동에 방해돼 여자와 사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총각 때는 인천에 사는 여학생이 아침마다 인삼차를 타오기도 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까 다 없어지더라.”

 - 제일 기억에 남는 감독은.

 “다 기억에 남는다. 허정무 감독님이 나를 대표팀에 이끌어주셨다. 한 번의 기회가 끝난 후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분이다. 조광래 감독님은 프로는 어떻게 운동하고, 생활하고, 플레이해야 하는지 알려줬다. 히딩크 감독님은 지도자의 리더십이 뭔지 가르쳐주신 분이다.”

 - 은퇴 기자회견에서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선수가 되기 쉽다’는 말을 했다. 멋진 말이지만 발로텔리(이탈리아)처럼 축구 잘하는 악동도 많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나는 노력 안 해도 잘 해요’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뒤에서 엄청나게 노력하면서도 그걸 숨기려는 심리가 있다. 발로텔리도 그 정도로 잘 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온 것이다. 발로텔리가 지금은 노력을 안 해도 당장은 표시가 안 난다. 2~3년 전에 노력한 게 지금 나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노력 안 한 것은 2~3년 후에 드러난다. 재능이냐, 노력이냐를 묻는다면 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 앞으로 계획은.

 “축구와 관련된 일을 계속 하고 싶다. 앞으로 2~3년 정도는 공부를 하면서 배우고 싶다.”

 이영표는 마지막으로 뛰었던 캐나다 밴쿠버 팀의 협조로 현지에서 스포츠 관련 공부를 할 계획이다. 그는 방송사들로부터 2014 월드컵 해설위원 제의를 받고 있다. 월드컵 때는 TV 해설자로 팬과 만날 것 같다.

글=이해준·김지한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6년 축구 선수 은퇴한 이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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