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54)전시하의 정치파동(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52년5월 1일 곽상훈 의원의 1백23명의 서명으로 제출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공고되자 원내 외에서는 자못 긴박감이 감돌고 여야가 곧 정면충돌할 것만 같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특히 정부와 여당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야당이 내놓은 개헌안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였다.
원내에서는 야당 와해와 포섭 공작을 벌이는 한편 원외에서는 이른바 「백골단」 「땃벌떼」등의 정치 폭력배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5월 14일에 정부는 야당측의 개헌안에 맞서기 위해 그해 1월에 부결된 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다시 국회에 내놓았다.

<이 내무의 취임 하루만에 선포>
정부측 개헌안이 제출 된지 열흘만에 장석윤 내무장관이 해임되고 친여인 원외자유당의 부당수 이범석 장군이 내무장관에 앉더니 하룻만인 5월 25일 0시를 기해 부산을 비롯한 전남북과 경남의 23개 시·군에 느닷없이 공비소탕을 이유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정부가 발표한 계엄선포문은 이러했다. 『일부지방에서 계엄해제로 공산도배의 출몰이 빈번하여 후방치안을 교란하고 민심을 소란케 하고있어 최단기내에 후방치안의 완전확보를 절대적으로 요청하고 있어 25일 영시를 기해 좌기 지방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사령관에는 육군중장 이종찬으로 하되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육군소장 원용덕을 임명하여 경남중 비상계엄 선포지구를 담당케 한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곳은 전북의 진안군 장수군 임실군 남원군 정읍군, 전남의 순천시 담양군 곡성군 구례군 광양군 성주군 화순군, 그리고 경남의 부산시 동래군 울산군 밀양군 양산군 하동군 산청군 함안군 거창군 등이었다.
당시 서남지구를 비롯한 후방 일부지역에 공비준동이 격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돌연한 비상계엄 선포는 그 표적이 국회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더욱이 국회의 야당세력은 내각책임제 개헌추진과 함께 5월 27일에 대통령 선출일자를 의결키로 전략을 세우고 있던 만큼 정부로서는 분초가 급했다. 이래서 부랴부랴 비상계엄을 선포해 놓고 26일 새벽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에 앞장선 정헌주, 장홍염 의원 등을 공산당과 관련됐다는 혐의로 우선 구속한 것이다.
비상계엄 선포는 야당에 큰 시련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군부에도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우선 군 관계자들의 증언.
▲최경록씨(당시 국방부 제1국장=육군소장·현 주영대사·52·주=일시 귀국 때 회견) <거창사건으로 물러난 신성모씨 후임으로 이기붕씨가 국방부장관이 되자 나에게 국방부 제1국장을 맡깁디다.
52년 봄 국회 야당세력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해 이대통령 지지세력과 날카롭게 대립되고 정국이 시끄러워지자 이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라고 해서 이기붕 국방장관이 내 의견을 물었어요.
계엄령은 국방부 제1국장 소관이었어요. 나는 이 국방장관에게 계엄령이란 천재지변 또는 전화로 행정질서가 마비되었을 때 선포하는 것인데 지금 계엄령 선포의 요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지요. 이기붕 장관도 내 말이 옳다고 해 이 장관과 나는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다고 버티었어요. 그랬더니 이기붕 장관과 내가 함께 자리를 물러나게 됐어요.

<정치개입 안 된다고 동원거절>
신태영 장군이 후임 국방장관이 되어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구에 있는 육본에 l개 사단의 병력을 계엄군으로 보내라고 했어요. 그러나 당시 참모총장인 이종찬 장군과 이용문 작전국장 김종면(구명종평) 정보국장 등이 일선에서 전투하는 병력을 빼돌릴 수 없다고 거절해 버렸어요. 정부는 하는 수 없이 헌병 2개중대만을 부산에 배치하고 정치파동을 치렀지요.>
한편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육군참모총장인 이종찬 중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다시 별도로 영남지방 계엄사령관에 원용덕 장군을 임명한 것은 그 의도가 뻔했다. 대구에 있는 육본의 총장이하 각 참모들은 비상계엄 선포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따라서 정부가 계엄군 동원을 요청했을 때는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이 같은 육본의 태도는 이승만 대통령을 격노시켰고 급기야는 육군참모총장의 경질과 육본참모의 집단 해임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정치파동을 전후한 일련의 사태는 이때까지 비교적 담담했던 군 본연의 자세에 「정치바람」을 스며들게 하였다.
다시 군 관계자의 증언.
▲이종찬씨(당시 육군참모총장=중장·전 국방장관·현 「코리어엔지니어링」사장·56)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며칠전 이승만 대통령이 대구 삼덕동에 있는 총장관사로 전화를 걸었어요. 이 박사는 부산을 계엄지구에 넣어야겠다는 말씀을 하면서 원용덕 장군에게 무슨 일을 맡겨야겠는데 사람됨이 어떠냐고 해요.
부산은 임시수도이고 치안상태도 좋은 형편 이어서 계엄지구에 넣지 않았는데 부산을 계엄지구에 넣어야겠다는 이대통령의 말을 듣고 나는 직감으로 무슨 일이 생길 모양이구나 생각했읍니다.
11사단 창립 기념식에 참석하러 간성에 가있는데 5월 26일 육본에서 장거리 전화가 왔어요. 계엄이 선포되고 김창용 특무대장이 서민호 의원을 구속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입디다.
내가 가서 처리할 테니 일단 보류해 두라고 말하고 즉시 비행기로 돌아왔어요.
육본에 오니 참모들이 「브리핑」을 하는데 김종면 정보국장이 부산에서 국회의원「버스」를 공병대「크레인」으로 끌고 갔다는 보고를 하면서 「쿠데타」가 난 것 같다 해요.
각 참모들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을 때 『군이 정치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말했읍니다.
각 참모들이 자기들끼리 좀 더 구체적인 회의를 하고 보고하겠다고 하더군요.
한 시간쯤 지나 참모들이 각 부대에 보낼 훈령을 만들어두었다고 보고합디다.
상황실에 가보니 흑판에다 군대는 도요하지 말고 본연의 자세로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에만 다하라는 내용의 훈령을 적어 두었읍디다.
그걸 읽어보고 나는 올바른 국군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읍니다. 이 같은 훌륭한 참모들을 둔 나는 행복하다고 느꼈읍니다.
그 훈령을 즉각 육군 각 부대에 보내도록 지시했읍니다.
나는 이 같은 방법만이 우리 군을 정치싸움에서 보호하는 정당방위라고 생각했어요.

<군은 동요 말라는 훈령 보내고>
정치를 하는 자는 변하더라도 군은 영원히 본연의 근본자세로 나가야만 장래가 양양하고 국토를 수호하는 간성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읍니다.>
▲김종면씨(당시 육본정보국장=중장·구명종평·현 서울신문사상임감사·50) <52년 5월 26일 정보가 들어오기를 헌병이 공병대「크레인」으로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끌고 가 국회의원을 구속했다고 해요.
나는 이건 「쿠데타」가 아닌가 생각하고 이종찬 총장에게 「쿠데타」난 것 같다고 보고를 했읍니다.
26일 오후 4시에 참모들이 일반「브리핑」은 그만두고 계엄선포에 대한 「브리핑」을 했읍니다.
당시 육본참모들은 차장에 유재흥 소장, 행정참모부장에 양국진 소장, 작전참모부장 이준식 소장, 인사참모 김용배 준장, 작전국장 이용문 준장, 법무감 손성겸 준장, 헌병사령관 심언봉 준장, 군수국장 백선진 대령, 계엄민사부장 이호 준장 등이었읍니다.
대부분 참모들은 『우리 군은 개헌문제에 관여할 바 아니다. 군이 정치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앞으로 정치싸움에 군이 동원되는 일이 전례가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의 생명보호와 국토를 지키는 군은 본연의 임무를 지켜야한다. 정치에 관여한 군인은 문책하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자』는게 그날 회의의 결론이었읍니다.
그래서 우선 각 부대에 이 같은 내용의 훈령을 보내기로 하고 초안을 작성했지요. 급한 김에 상황실에 있는 흑판에다 훈령 전문을 적어두고 이종찬 총장에게 보였읍니다. 이 장군이 우리들이 만든 훈령을 보더니 눈시울을 적시면서 『참모들의 이 같은 애국충정을 몰랐다는 걸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즉시 각 부대에 보내라고 합디다.
당시 육본참모들은 모두가 패기에 차고 정의감에 불타있었어요. 그때 상황으로 보아 우리 군이 정권욕을 갖고 개입하려 했으면 아주 쉬울 때였지만 군은 그야말로 순수한 군인의 자세에서 조국의 간성인 군은 정치싸움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읍니다. 비상계엄 선포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 이승만 대통령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야당인사들이 군을 이용하려고 했었어도 당연히 거부했을 겁니다.>

<정쟁 위한 선포에 군선 못마땅>
▲김태청씨(당시 육군법무차감=대령·예비역준장·현 변호사·55) <법무감실에서는 계엄선포가 정부의 선포 이유에서 밝힌바와 같은 치안유지가 아닌걸 알고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읍니다. 그래서 원용덕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이 계엄군법회의에 법무요원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손성겸 법무감과 나는 반대했읍니다. 정면으로 거부할 수는 없고 그냥 어물어물하면서 사람을 보내지 않았지요.
뒷날 당시 육군의 모 고위장성을 만나 『우리들은 이대통령이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하고 헌법을 파괴하는 이대통령을 축출할 생각까지 했으나 병력 동원권이 없어 못했는데 장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했읍니까』고 물었더니 그분도 『그런 생각을 전혀 안한건 아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친한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뱃속을 몰라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고 합디다.>
◆주요일지(1952년 2월5, 6, 7, 8일)
※5일 ▲내무에 장석윤, 보건에 최재유씨를 각각 임명
※6일 ▲휴전회담, 의제 제5항 토의개시 ▲「리지웨이」사령관, 문산 방문 ▲이대통령, 정부제출의 개헌안 부결을 비난 ▲영국 왕 「조키」6세 서거
※7일 ▲B-29, 북한 야간출격
※8일 ▲서남지구 공비소탕 종합전과 l만7천4백78명을 사살·생포·귀순 ▲이대통령, 「인접해양의 주권」선언에 관해 성명 ▲영국 신왕에 「엘리자배드」2세 즉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