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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포커스] 출산·육아·가부장제 … 3중 족쇄에 옴쭉달싹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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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성들의 아름다움은 찬탄을 일으킨다. 그래서 삶도 순탄할 것 같지만 아니다. 러시아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보수적이어서 곳곳에 유리천장이 있다. [리아 노보스티]

한국 남성 사이엔 러시아엔 미녀들만 있고 그들은 행복하기만 할 것이란 ‘단순한 생각’이 은연중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러시아 대기업에서 여성들은 대부분 말단 사원이자 부하직원이다. 고위직은 대부분 남성들 차지다. 남녀평등 의식이 확산하고 여성들이 군인, 파일럿, 자동차 정비사 같은 기존의 남성 직업군에 활발히 진출하지만 승진의 길은 여전히 남성보다 멀고 험난하며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있다.

엘레나 쿠즈네초바(27)는 2008년 대학 졸업 후 7개월간 전공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졸업장엔 ‘목조 건축물·목공예품 복원가’라 적혀 있다.

“멋지게 들리지만 실제론 나무껍질을 벗겨내고 대패질을 하는 목수 일과 비슷해요. 남자 면접관들은 제가 이 일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제 키는 1m58㎝인데 아마 연장도 제대로 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기회조차 주지 않았죠”라고 한숨을 쉰다. 그런데 유럽 출장을 자주 다니다 이탈리아에서 뛰어난 여자 목공을 본 임원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엘레나는 고용됐다. “겨우 편견의 틀에서 벗어난 상관을 만나 매우 기뻤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기쁨은 빠르게 실망으로 바뀌었다. 4년간 일을 열심히 하고 분명한 업무 성과도 많이 냈지만 그녀는 승진하지 못했다. 그 사이 세 차례 부장직이 비면서 기회가 있었지만 매번 남자 동료가 자리를 차지했다. 나중엔 월급도 남자 동료가 더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는 문득 ‘회사에 여자 간부가 있기는 한지’ 생각해 봤다. 임원진 비서부의 총괄 비서와 경리 두 명뿐이었다. 나머지 관리직엔 남자들뿐이었다. 엘레나는 충격을 받고 다른 일을 찾아볼까 생각했다. 지금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학위 과정을 시작했다.

러시아 노동시장에서 엘레나가 겪는 고통이 그녀의 문제이기만 할까. ‘페닉스’ 신사회학 실용정치연구센터장 알렉산드르 타라소프는 “전에는 남자들 때문에 여자들은 보통 여성끼리 경쟁했지요. 야심 있는 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능력을 발휘해 직급이 높은 남자와 결혼하거나, 처음부터 남편이 승진하도록 돕는 두 가지 방법을 택했어요. 가까운 사람들은 누가 진짜 책임자인지 알았지만, 공식 대표는 남자였어요”라고 말했다. 그 시절 여자들은 온갖 방법을 강구해 남편의 승진을 도왔다. 오늘날 여자들은 스스로 경력을 쌓을 기회를 얻었지만, 남자들과의 승진 싸움에서 배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

광고회사 ‘벡토르’의 블라디미르 페트로프 사장은 “함께 일하기 편해서 되도록 남자 사원을 뽑아요. 덜 감정적이고, 언제든 부담 없이 업무에 투입하고, ‘가족에서 떼어놓았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되거든요. 남자들은 중요한 순간에 출산휴가를 가진 않잖아요”라고 말한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그 외에도 또 있다. 그는 “광고 분야엔 여자들이 많이 지원해요. 만약 면접에 수퍼모델 같은 지원자와 외모가 평범한 지원자가 찾아오면 전 항상 평범한 지원자를 선택해요. 다른 사원들이 업무에 집중하는 데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죠”라고 설명했다.

그 결과 고위직에 오르는 여성은 손가락에 꼽힌다. 예를 들면 장관의 97%가 남성이고 의원, 기업 임원, 학과장, 총장 중에선 남성의 비율이 90%가 넘는다. 여성들이 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하는 직업은 예외다. 여성 책임자가 많은 분야는 서비스 분야와 금융이다. 이런 분야에서 여성 사장의 비율은 25%다. 러시아에서는 은행 고객 상담, 사무원, 인사 및 홍보팀, 회계, 개인 비서 등의 은행 관련 특정 업무는 으레 여성의 직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모스크바 은행의 마리나 볼코바 대출팀장은 “저는 팀장이 되기 위해 스스로 남성과 동등하게 여길 수 있도록 심리 훈련 과정을 거쳤습니다. 가끔 남자 상관들 앞에서 주눅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저는 약간의 꾀를 냈습니다. 동사를 말할 때 여성형 대신 남성형으로 말했어요(러시아어 동사는 남성형과 여성형 활용이 다르다). 웃기게 들리긴 하지만 효과는 있지요”라고 말한다.

남자들과 높은 자리를 놓고 경쟁할 때 여자에게 불리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여성들은 늘 가족과 경력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아이를 낳고 기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아직도 많은 여성이 가족을 택하곤 한다. 하지만 러시아 여성들은 남편이 돈을 잘 벌더라도 아이들을 돌보며 집에만 앉아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주부가 아니라 인생의 성공을 원한다.

모스크바대학 심리분석 연구소의 알렉세이 폴레보이 교수의 말은 의미가 깊다. “출산 전까지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오르지 못하면 그 이후에는 점점 더 성공이 어려워져요. 중책을 맡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고 심리적으로 가족들이 자신을 더 이상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보통 일하는 여성들은 이혼을 하거나, 결혼을 아예 하지 않고 아이들을 구속해요. 이들은 일반적인 여성들에 비해 배우자를 찾는 데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평범한’ 남자는 사회적 지위나 자신감 면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성에 차지 않죠.”

그뿐 아니라 모든 남편이 ‘성공에 매진하는 배우자’를 지지해 줄 준비가 돼 있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엔 그럴 능력이 없는 남자들도 있다.

심리학자 엘레나 아르히포바는 “많은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여성이 높은 직책에 오르고 남편보다 연봉을 많이 받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죠. 그럴 때면 여자는 남편의 재정적 역할이 얼마나 큰지를 일깨워주며 위기를 모면해 나갑니다 ”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첫째가 가족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출산 후 3년간의 출산휴가를 가진다.

“심리적 어려움 말고도 기술적 어려움도 있습니다. 인구가 부족한데도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기는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유치원 대기표에 이름을 올립니다. 아이가 코감기에만 걸려도 전쟁터 같은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집에 가서 아이를 돌봐야 해요”라고 알렉산드르 타라소프가 푸념했다.

러시아에는 여자들이 고위직을 맡을 만큼 페미니즘이 발전했다. 하지만 러시아 사회 자체는 아직도 가부장적이다. 여자 상사 밑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여자는 남자를 못 다스린다”며 아직도 콧방귀를 뀐다.

류드밀라 나즈드라체바 기자

본 기사는 [러시스카야 가제타(Rossyskaya Gazeta), 러시아]가 제작·발간합니다. 중앙일보는 배포만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러시스카야 가제타]에 있습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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