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산|이호철 <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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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 고향은 원산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산 거리를 서남으로 에워싸고 있는 덕원군 현면의 현동이라는 산자수명의 농촌이었는데 왜정 말에 현면이 원산부에 편입이 되면서 촌놈들이 갑자기 원산 시민을 자처하게 되었다.
우리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 맑은 강이 바로 명사십리 옆으로 해서 동해 바다로 드는데, 명사십리가 있는 명사리도 우리 마을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덕원군 현면에 속해 있었던 촌놈들의 마을이었다.
한데, 요즘 어디 가서나 겪는 일로서, 고향이 원산이라고 하면 누구나 으례 명사십리를 들먹인다.
『명사십리 해당화가 그렇게 멋있었다면서요. 모래도 기가 막힌다면서요. 좋은데 사셨읍니다아.』
이런 때마다 나는 곤혹을 느낀다. 우물딱 주물딱 그 자리를 때우기는 하지만, 나는 사실은 명사십리에서 수영을 해 본 일이라곤 한번도 없는 것이다. 물론 해당화도 본 일이 없다.
내가 국민학교 4, 5학년 때부터 이곳은 일본 항공대가 들어서고, 철망이 쳐지고 「도치카」가 생기는 등 어마어마한 곳으로 둔갑을 했던 것이다. 설령 항공대가 들어서지 않았더라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삐죽삐죽하게 생긴 서양 사람들의 별장만 주로 있고 이방 사람들만 많이 들끓고 있는 그곳에 아무리 코 앞 동네에 살았다고는 할 망정 덕원군 현면의 촌놈이 감히 들어가서 놀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나 개인으로는, 지금도 명사십리 얘기가 나오면, 기묘한 곤혹과 함께 그 어떤 적의까지 슬그머니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내 고향의 여름은 어디인가, 명사십리도 송도원도 아니다. 아실은 우리 마을 앞을 흐르던 그 강이었다. 그 강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고, 달이 뜬 밤이면 강가 모래밭에서 백양나무 잎이 서걱이는 시원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항구치기>라는 놀이에 열중하였고, 흔히 <당추밭머리>라고 불리던 휘돌아간 여울목에서 수영을 익혔던 것이다.
특히 기억이 나는 것은, 나는 다섯살 여섯살 무렵에 동네 서당에를 다녔었는데 그 지겨웠던 기억이다. 그 무렵의 우리네 어른들은 둔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어서, 한창 자랄 어린애들로 하여금, 종일을 서당에 묶어두고 글을 읽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점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억울해질 지경이니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원체 더운 날이면 구 목석들도 더러 제정신이 있었던지 어쩌다가 한번씩 내보낸다. 아, 그때의 해방감이라니! 먼지가 폴싹폴싹 이는 당추 밭 사잇길을 「아잇 뜨거」「아잇 뜨거」하며 조그만 맨발로들 달려나가서 훌러덩 훌러덩 다 벗어붙이고는 모두 고추를 드러 내놓은 채 펑더덩 펑더덩 물 속으로 뛰어 드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내 고향 여름의 절정 부분이다.
그 후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송도원 해수욕장엘 다녔다. 물론 이 때는 점잖게 가릴 것 가리고 붉은 석양 무렵 멀리멀리 나가던 일. 특히 바닷물로서 그렇게 따뜻한 수온이었다는 것은 그 후 남한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야 새삼스럽게 절감되었다. 송도원의 바닷물은 만리포에 비하면 그야말로 목욕물이다. 멀리멀리 나가도 별로 변화가 없이 따뜻하다. 하하, 이제야 송도원이 왜 좋았던지를 알겠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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