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무덤인가|학계에 파문 던진 부여「전방후원분」형 구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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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8일 고고 학계의 두 소장 학자가 『부여 지방에도 전방후원분이 있다』고 발설한데 대해 학계는 뜻밖의 화제로 받아들이면서도 의아한 표정이다. 도대체 그러한 고분 양식의 존재가 가능할까. 그들의 지적한 곳이 정말 자연적 인덕이 아니고 무덤으로 축조된 것일까. 그 문제의 제기 자체가 대담한 것인 만큼 학계의 제3자로서는 부정이나 시인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일본의 1천5백년전쯤 독특한 고분 양식으로 알려진 이 전방후원분이 우리 나라에도 실존한다고 주장한 고대 박물관의 윤세영 주임과 경희대 황용운 박물관장은 71, 72년 두햇동안 3차에 걸쳐 답사한 결과 확신을 얻었다고 장담한다. 물론 그 외형이 일본의 그것과 똑 같다는 점에서이다.
백제와 연관이 깊은 일본의 기내 지방에만 있는 이 한 고분은 4∼6세기쯤의 것들로서 그야말로 산 같은 고분이다. 뒤로 크고 둥근 봉토가 쌓였고 그 앞으로 네모지게 흙을 모아 놓았다고 해서 「전방후원」인데 그 길이는 작은게 2백20m이고 큰 것은 4백80m. 우리 나라에서 크다고 알려진 직경 20∼40m짜리 삼국 시대 고분과는 비교도 안되는 크기이며 종래의 고분에 대한 선입관으로 해석되지 않는 구릉이 요산이다. 두 소장 학자가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부여두리 일대에서 찾아냈다는 4개의 구릉은 들 가운데 솟아 있는 잔솔밭 언덕으로 길이가 대개 2백50m나 돼 그 한 끝엔 마을이 들어 서 있다.
이것이 고분이라는 전제 아래 추정 연대는 백제 건국 이전의 3세기쯤이나 그 이전-역사 기록을 갖기 이전의 삼한 시대에 속하지 않겠느냐고 윤세영씨는 말한다. 그가 확신의 증거로서 제시하는 조건으론 ①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마찬가지로 들 가운데 있는게 특색이고 ②점토로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③인공의 흔적이 있는 판석·석주 같은 유사 석재가 여기저기에 많이 있다는 점등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 박물관장 김원룡 박사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큰 문제이고 자연 지형으로도 그 같은게 얼마든지 있는 만큼 신중히 조사해 봐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일제 때에도 일인 학자가 나주에서 그와 비슷한 지적을 한 바 있지만 허황한 얘기로 끝났었다고 반신반의의 태도를 취한다. 심지어 경주 오릉에 대해서까지 전방후원 양식을 적용하려한 예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 진홍섭 박물관장 역시 『그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 만큼 신중히 검토돼야 할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우리 나라의 확실한 왕릉 가운데 그러한게 하나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묘제는 보수성이 매우 강한 사회적 관습이기 때문에 쉽사리 변혁되지 않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전무후무한 새로운 양식의 존재 여부를 검토하기에 앞서 우선 그 언덕이 인공 축조인지 자연적인 것인지를 판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 한다.
조사자 윤·황 양씨는 물론 그 점을 전혀 확인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고분 내용이 횡혈식인지 수혈식인지 알 수 없으며 출토 유물도 알 수 없다.
따라서 3세기 이전으로 추정하는 것은 우리 나라 고분 시대 이전의 묘제 즉 일본의 그것보다 앞서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계산에 불과하다.
3세기 이전이라면 우리 나라에서 가장 밝혀지지 않은 초기 철기시대에 속한다.
이 무렵에 고구려·백제·신라를 건국한 사람들과는 다른 거대한 부족이 부여 지방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윤세영씨는 혹시 직산 지방에 근거를 둔 삼한의 목지국을 짚어 볼 수도 있다면서 충남 일원에서 전방후원분을 수십개쯤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내다본다.
그러나 만약 그리 큰 고분을 축조할 만한 세력의 부족이 그 지방에 살았다면 그들의 전통이 앞서는 시기와 뒤시기에 다소 나타나야지 않겠느냐는 것이 국립박물관 윤무병 부관장의 의견이다. 만약 그 부족이 백제의 건국 세력과 전혀 다른 세력이라면 ①백제보다도 먼저 국가를 형성했어야 할 것이고 ②백제가 서울에서 공주를 거쳐가는 동안 이 부족과 충돌했을 것인데 문헌상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③고분이 있으려면 당시 주민의 취락과 산성 등 주변의 인문 지리적 배후 관계가 확실해야 한다는 점등이 윤 부관장의 지적 하는 선결 요건이다.
어쨌든 전방후원분이 우리 나라에도 존재한다면 한·일 문화 교류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임에 틀림없고 또 고대사도 여러가지로 개편돼야 하겠지만 『실제 발굴해 확인하지 않고는 어떻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피차의 공통된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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