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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시-황동규<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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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각설하고, 윤회하는 것이 다 아름답지는 않다. 우리 나라 시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저승」은 상당히 깊은 불교적 광맥이기는 하지만 너무 선험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이승과 저승을 하나의 공간 속에 놓으려는 시적 노력이었고 그 노력의 결과 상상력의 확대가 이루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특히 신라정신의 돌파구로서 서정주씨의 저승은 상당히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다른 시인들의 저승에서 이승 체험의 엷음을 읽었다면 필자만의 슬픔일 것인가?
지난 10년간 「타령조」「처용 단장」「처용」등 일련의 시를 통해 언어를 혹사하면서까지 체험의 정련과 정련 된 체험이 담길 「틀」을 위해 애써온 김춘수씨의 「수련별곡」(현대시학)에서 저승을 발견하고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 땐가 다시 한번
낙화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번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이고 받든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떫디떫던 눈웃음은 누가 가지리오?
물론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은 쉬운 왕래 처로서의 저승은 아니다. 불가피한 죽음 앞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수련인 그대의 아름다움, 혹은 인간인 그대의 아름다움이 소멸돼야 함을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사멸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아름다운 조사요 반 불교적인 발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에는 반대방향에서 부는 바람이 있다.
즉 <그대 이승에서 꼭 한번 죽어야 한다면>의 <꼭 한번>전면에는 <그대는 또 가야하리>의 <또>라는 반복적이고 윤회 적인 기둥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논리적 모순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아니다. 그 모순이 갈등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나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이야기다. 지난해에 완성된 김춘수씨의 『처용 제1부』의 속편이 저승에의 손쉬운 나들이가 될까보아 은근히 겁이 난다.
체험의 시적 표현을 위해 어떤 신화의 틀을 찾아 그것을 그릇으로 사용하는 수가 있다. 박경석씨의 『데상연습』(시문학)은 자기의 체험을 「율리시즈」신화로의 접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거룩한 수예사 페넬로피,
30개월의 군복무 끝에
돌아와 고향의 모래톱을 밟는다.
출몰이 잦은 해안선에
군번 늦은 바리케이드,
불침번을 서는 동안
나는 아내의 체온을 비워두었다.
물집 부르튼 나의 맨발을
파도의 혓바닥이 핥고 있다. (1∼9행)
베틀의 슬기를 좀먹는 동안
아내는 수틀에서 직조하는 기다림과 만날 것이다. (22∼23행)
30개월의 녹슨 군번을 떼고 온 지금,
배고픈 싸움이 새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27∼28행)
십여 년의 방랑 끝에 거지로 돌아와 아내와 왕국을 찾는 「율리시즈」와 이 시의 <나>사이의 상호반사는 여기서 끝난다. 28행까지 박경석씨는 종전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드러머」와 「스피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행은 약간의 실망을 안겨준다. 결국 빌려온 모든 <틀>은 반환해야 하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은 틀을 지닌 채로의 체념을 보여준다. 반환이 끝난 후의 정적이나 더 큰 광선으로의 비침이나 새로운 방랑이나 혹은 다른 그 어떤 것이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적어도 <하나 남은 내 사랑의 화살이므로>같은 마지막 행의 평범히 깃들인 체념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지막 행의 상투적인 언어는 노향림의 「1950년 여름」(월간중앙)에도 등장한다.
들 언덕도 푸설 속에
머리부터 처박고
숨어 있었다.
무슨 일이 지나갔다.
지나던 여울물소리가
샛눈을 뜬 채
죽어 엎으러져 있다.
로 시작되는 이 시는 상당히 섬세하고 정돈된 감각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산맥들 등뒤로 창백하게 질린 하늘이 아미를 비비며 말이 없었다>의 마지막 행이 워낙 평범한데다가 <아미>같은 필요 없이 고전적인 낱말이 튀어나와 당황하게 해준다.
그러나 마지막 한 연 한 행만 잘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은 시가 될 것인가라는 희망은 부질없는 것이다. 문제는 시인의 생관전체에 달려 있다. 자기자신이 되기 위해 시인은 이미 지니고 있던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거듭나야하는 것이다. 평범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를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 이승훈씨의 『절망시13편』(현대시학)은 평범하지 않으려는 정신을 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발각되지 않는 희망>(초조), <자옥히 뜯기는 설경의 끝>(우화)같이 날카로운 비유와 더불어 시에 대한 그의 몸바침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들은 집중되어 있지 않고 또 너무 「피치」가 높아서 시에 대한 그의 신앙은 일부 전도사의 신앙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신석초씨의 『꽃잎절구』(시문학)의 조그만 아름다움도 기쁨을 준다. <저문 산 길가에 저, 뒤 둥글 지라도 마냥 붉게 타다 가는 환한 목숨이여>같은 절구가 범 속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아마 신석초씨의 연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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