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인천 바랴크 추모비 헌화 이끈 파워맨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지난 13일 오후 인천의 바랴크함 추모비 헌화에 앞서 푸틴 대통령이 정헌 주한 러시아 명예 총영사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 정헌 명예 총영사]

지난 13일 오후 7시50분쯤, 인천광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의 바랴크함 추모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1904년 러일전쟁 때 희생된 러시아 장병에게 헌화를 하고 러시아의 13개 방송이 앞다퉈 중계를 한다. 그런데 헌화용 붉은 장미를 든 푸틴 대통령 옆에 한국인 한 명이 바짝 붙어 통역도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청와대의 의전담당도 아니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5분 정도에 걸쳐 인천에 왜 바랴크 추모비가 있고 러시아 이름을 가진 광장이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 모습은 당연히 눈길을 끌었다. 푸틴과 그렇게 가까이 볼 수 있는 한국인은 누구인가. 정헌 주한 러시아 명예 총영사다.

푸틴의 방한 일정이 끝난 뒤 그에겐 ‘푸틴의 일정을 인천으로 돌린 파워맨’이란 말이 붙었다. 전 세계 영향력 1위로 꼽히는 푸틴의 빡빡한 방한 일정을 쪼개서 인천으로 ‘모셔왔기’ 때문이다.

3개월 전쯤 그는 푸틴 대통령이 11월 방한한다는 말을 들었다. 즉각 ‘인천의 바랴크 추모비를 방문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왜 바랴크인가. 먼저 러시아가 생각하는 바랴크를 알 필요가 있다.

크렘린, 난색 표하다 방한 사흘 전 OK 통보
바랴크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제물포항에서 수장된 러시아 군함이다. 정 명예 총영사는 “그 배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고 장렬히 숨진 애국 정신과 같은 것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한다. 1904년 2월 9일 목제 전함인 카레예츠는 제물포항을 떠났다. 그리고 월미도와 팔미도 사이에서 일본군 함대의 포격을 받았다. 이에 루드네프 함장이 지휘하는 순양함 바랴크가 급히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역시 45분간 일본군의 집중 포격을 받았다. 박살난 병사의 몸 조각이 포신에 널렸다. 일본군은 항복하라 했지만 거부하고 두 배는 제물포로 방향을 돌렸다. 처절한 모습에 인근의 영국·프랑스·이탈리아 선원들이 눈물의 경례를 했다. 루드네프 함장은 ‘바랴크는 수장, 카레예츠와 숭가리(인근에 있던 러시아 상선)는 자폭’을 결정했다. 정 총영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조국의 명예를 위해 나가 싸웠다는 애국 정신이 바랴크 정신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런 바랴크 정신을 제국 러시아, 사회주의 소련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쳤고 현대 러시아도 가르치고 있다. 기념 노래도 8개나 된다. 그는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행진곡풍의 바랴크 노래를 불러줬다.

그러나 푸틴 일정을 바꾸는 건 난관의 연속이었다. 나중엔 많은 도움을 줬지만 콘스탄틴 브누코프 주한 러시아 대사는 초기엔 “외교부 공무원의 역량을 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단 러시아 외교부를 통해 공식 요청만 접수한 뒤 크렘린 수뇌부와의 비상망을 가동했다. “바랴크함 헌화는 러시아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자리이며 그곳에 푸틴 대통령이 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답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푸틴 대통령은 베트남을 하루 방문한 뒤 곧장 한국을 하루 일정으로 방문하기 때문에 정상회담 외엔 시간 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정 명예 총영사는 고집스러웠다. 사람을 통해 계속 전언을 넣었고 크렘린을 두 번 방문하고 연락도 꾸준히 했다. 두 달쯤 지나 긍정적 신호가 왔지만 여전히 ‘시간이 없다’는 꼬리가 달렸다. 드디어 방문 10일 전 인천으로 1차 선발대 24명이 왔다. 동선을 살피고 안테나를 설치했다. ‘됐다’ 싶었다. 그런데 3일 뒤 ‘인천행 취소’ 통보가 왔다. 정 명예 총영사는 8일 ‘푸틴 대통령이 인천에 오지 않으면 향후 인천과 러시아의 협력 사업이 쉽지 않다. 그러면 내가 명예 총영사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고 연락했다. 배수진이었다. 푸틴 대통령 방한 사흘 전인 10일 저녁, ‘OK’ 통보가 왔다. 그렇게 해서 푸틴 대통령은 4강 정상 중 인천을 첫 번째로 방문했다.

‘대통령 일정을 바꾼’ 그의 역량은 사실 그가 러시아 외교사상 드물게 한국의 명예 총영사가 되는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수교 이후 20여 년 동안 러시아 외교부는 지속적으로 명예 영사 명단을 크렘린에 추천했지만 다 거부됐다. 그런데 “2011년 크렘린은 러시아 외교부에 나를 명예 총영사로 지목하고 한국 외교부에 아그레망을 신청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받은 훈장도 영향을 줬을 수 있다. 그는 2005년 국립 모스크바 대학 교수 시절 ‘명예와 존경’ 훈장을 받았다. 2009년 7월엔 바랴크호 유물 러시아 순회 전시를 도운 공으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러시아 연방 해군 300주년 기념 훈장’을 받았다. 두 달 뒤인 9월엔 ‘러시아 프로페셔널’ 훈장을 받았다. 그는 2013년 2월엔 다시 최고 훈장인 ‘미르 이 드루즈바(평화와 우정)’ 훈장을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1991년 이후 꾸준히 한·러 관계 발전을 위해 기여한 점이 평가된 것이다. 지금도 그는 ‘지원 한 푼 받지 않고’ 한·러 관계를 위해 열심히 뛴다.

“푸틴, 강행군하다 지각 … 좀 크게 봐줬으면”
-푸틴 대통령이 한국엔 지각 외교로 무례를 범했다는 인상을 남긴 것을 어떻게 보나.
“원래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12일 밤 10시쯤 오기로 했다. 그런데 베트남 일정이 지체돼 13일 새벽 2시50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이동·휴식하면 새벽 5시다. 또 공식 행사에 나가려면 두 시간 정도 준비가 필요하다. 거의 잠을 못 잤지만 그래도 정시에 가깝게 청와대로 출발했는데, 숙소인 롯데호텔 앞에 삼보(러시아 유도)를 하는 어린 학생들이 도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삼보 선수인 대통령 마음이 어땠겠는가. 이들과 악수하다 또 지체됐다. 그런게 쌓여 늦은 것이다. 우리 손님인데 좀 크게 볼 수 없는 걸까.”

-한·러 관계에 충고를 한다면.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돼 인적·물적 교류가 왕성해질 것이다. 그전에 우리의 러시아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러시아를 마피아와 연결하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정헌 고려대 노문학과 졸업. 1991~96년 ‘노보에 브레마(뉴 타임스)’ 서울 특파원·지국장. 1996~2004년 모스크바서 수학. 모스크바대 종신 정치학과 교수. 2011년 주한 러시아 연방 명예 총영사. 현재 동아시아전략연구소 소장.

안성규 러시아·CIS 순회특파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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