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신령 노릇 22년|산에 미친 (?) 산 사람 허우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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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설령 천금이 생긴다 해도 또 누가 그럴 사람이 있을까? 산이 좋아 처자식까지 버리고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원시인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리산 신령」「산사람」으로 통하는 허우천씨 (56).
올해 꼭 22년째. 산 다기 보다 인적도 드문 무서운 깊은 산중에서 산짐승처럼 야생하고 있다. 해발 1천2백m의 지리산 봉우리. 산길에 어두운 사람이면 다시 찾기조차 힘든 이곳에 단 한 채의 토담집이 있다.
흡사 시골집 헛간 같지만 허씨의 보금자리다. 허씨는 이 토담집에서 흘러가는 구름, 피고 지는 고산 식물의 꽃, 속삭이는 솔바람을 벗삼아 살아가고 있다. 조그만 뙤 밭으로 양식을 일구며 때로는 나무 열매·산나물로 배를 채우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더 부러울게 없단다.
허씨가 처음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일정 때 일본 입명관 고등학교 유학 시절. 당시 학교에는 「동정 클럽」이라는 등산 반이 있었다.
이 등산 반은 다른 점이 있었다. 그 이름대로 전 회원 50여명은 산을 즐기 돼 여자를 가까이 말 것을 지키자고 서로 굳게 약속했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산을 좋아하던 허씨는 이 등산반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고 공부에는 딴전을 부렸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그런대로 마칠 수 있었다. 대학 진학이 문제였다.
당초 산에 빠져 허씨 자신은 대학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결국 대학은 포기하고 말았다. 부모들의 걱정이 대단했다.
부모들은 결혼을 시키는 것만이 아들의 마음을 돌리는 길이라 결론을 내렸다. 아들을 일시 귀국시켜 고향 진주에서 강제로 강가를 보냈다. 그때 나이 22살.
허씨는 부인과 함께 다시 일본에 건너갔다. 그래도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고 했다. 『산의 향수 때문에 신혼의 달콤한 꿈도 몰랐었다』는 것.
7년 만에 허씨 일가족은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나이 29살 때.
부인 그리고 딸 셋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 허씨는 진주에 「대동」이란 서점을 냈다. 2년 동안 꾸려갔으나 서점은 결국 문을 닫았다.
산에만 정신이 팔린 그의 서점이 될 리가 없었다. 더욱 홀가분해진 그는 완전히 산에 미치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돌보지 않게 됐다. 참아왔던 부인도 신물이 난 것은 이때. 허씨가 31살 되던 어느 가을이었다. 허씨 부인은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애원을 했다. 산에 가지 말아달라고-.
부인과 다툼을 벌인 허씨는 그날 맨몸으로 영영 집을 나가 버렸다. 그 길로 발길을 돌린 곳이 경남 창령의 「가골산」.
그는 해발 1천m의 산중턱 양지바른 곳에 땅굴을 팠다. 풀을 꺾어 땅 골 바닥에 깔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오랜 등산에서 익힌 산나물을 캐 배를 채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원시인이 된 것이다. 이 땅굴에서 지내기 2년.
지리산으로 옮겨 갔다. 해발 1천2백m의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토담 움막을 세웠다. 그가 집을 나온 후 가족들에게 아무 소식도 안전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다가 4년째 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부인이 이 토담집을 찾아왔다.
부인은 꼬박 3일 동안 남편 곁을 떠나지 않고 설득했으나 허씨의 대답은 너무도 완강하고 간단했다. 『이미 산에 바친 몸이니 단념하라.』 부인도 모든 것을 사주팔자로 돌리고 산을 내려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혼자 살지만 허씨는 요즈음 하루 해를 바쁘게 보낸다고 했다.
철 따라 지리산에 많이 찾아 드는 등산객들을 위해 보답 없이 큰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산허리 험한 비탈에 이미 등산길 18개소 1천2백m를 닦았고 20여개 옹달샘까지 파놓았다.
이제 산길 안내역도 해주며 몇 푼 생길 때마다 곳곳에 안내판까지 만들어 붙이고 있다.
그는 지리산에 사는 동안 줄잡아 7만여명의 등산객을 안내하고 조난 등산객을 구해 기쁜 일도 많았지만 괴로운 일도 많았다고.
지난해 5월 서울 산악 회원 9명이 해발 1천2백m 고지에서 독초인 「누렁이」를 약초로 잘못 알고 먹어 집단 중독, 그 중 1명이 숨져 갔을 때 가장 슬펐다는 것이다.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6년 전 가을 남원에 나갔을 때였다고 한다. 주민들이 그를 보고 공비가 출몰했다고 신고, 경찰서에 끌려가 혼이 났다는 것.
허씨가 22년 동안 산 속에 살면서 자작한 산 훈은 『산에 오르면 나무와 바위 그리고 짐승을 건드리지 말자』라고.
『지리산에 살다 지리산에 묻히는 것이 또 하나 소원』이라는 허씨의 산훈은 산길 초년생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진주=곽기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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