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제자 윤석오>|<제26화> 경무대 사계 (86)|김상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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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호>
이 박사의 경호와 경무대 경비는 경무대 경찰서에서 맡았다. 경무대 경찰서는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된 후 곧바로 생겼다.
초대 경찰서장은 작고한 김장흥씨였다. 김씨는 이 박사가 환국한 후 돈암장에 있을 때부터 이 박사의 경호를 담당했다.
김장흥씨는 당시 중부 경찰서 외근 주임으로 계급이 경위였는데 돈암장 경비를 위해 파견됐었다. 김씨는 이때부터 나중에 치안국장으로 승진할 때까지 마포장·이화장·경무대로 이 박사를 줄곧 따라 다녔다.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되어 경무대로 이사를 가자 김씨도 경무대로 옮겼고 그때 경위였던 김씨는 경감으로 승진되어 이 박사의 경호 책임자가 됐다. 곧이어 경무대 경찰서가 생기자 김씨는 몇달 안돼 다시 총경으로 승진되어 서장을 겸했다.
처음 경무대 경찰서가 생길 때 서원은 모두 4백여명이었다. 그러나 57년께부터 인원이 3백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때 대통령 경호만을 전담하는 경호계가 별도로 생겼다.
경호계 인원은 20∼30명 정도였다. 모두가 신분과 사상이 확실한 것은 물론 체격도 좋고 인물도 괜찮은 사람들로서 각자가 모두 한가지씩 특별한 무술을 가지고 있었다.
경무대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 외교 사절이나 장관은 전화로 직접 본관까지 갔으나 다른 사람은 모두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는 경비실을 들러 주소·성명을 기록하고 신원이 확실한지를 알고 난 후 통과됐다.
이 박사가 하오에 산책을 나갈 때는 15∼20명의 경호원이 무전기를 가지고 주위를 경호했다.
이 박사는 민정을 알아보기 위해 가끔 삼청동으로 통하는 고갯길을 산책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담」이 손짓을 해서 일반인들의 통행을 제한하게 했다.
진해나 또는 다른 곳으로 이 박사가 떠날 때는 경호원들이 20∼30명씩 따라 다녔다. 그 중에는 헌병들도 끼여있었다.
이 박사가 서울 시내나 진해 등 다른 곳을 다녀오면 경관들이나가 경무대 구내를 샅샅이 뒤져 위험물이 없나를 확인했다. 그것은 초기에 경무대 앞길에 있는 향나무 밑에 「다이너마이트」가 장치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엔 경무대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57년께부터로 기억되는데 치안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난 후부터 날짜와 시간을 정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앞에서 말한 경호 책임자 김장흥씨는 신임이 두터워서 항상 그림자처럼 이 박사를 따라다녔고, 그만큼 출세도 빨랐다. 얼마 후 김씨는 경무관으로 승진되어 이 박사의 경호만 전담하고 경찰서장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김장흥씨는 그후 내무부 치안국장을 거쳐 강원도 지사까지 지냈다.
후에 서장을 한 김국진씨도 돈암장 시절부터 줄곧 이 박사 승용차를 운전해온 경관이다. 김씨는 이 박사가 환국할 당시 경찰학교 소속 순경이었었는데 이 박사가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때 경비를 위해 파견됐다가 그대로 일하게 됐다. 그때 김장흥씨는 경위였고, 김국진씨는 순경이었다.
이 박사가 돈암장에 있을 때 운전사를 한사람 구하게 됐는데 마침 김국진씨는 해방 전에 운전사 면허를 얻었기 때문에 바로 이 박사 운전사로 일하게 됐다.
이 박사는 언제나 『국진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야만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한번은 이 박사가 급히 외출을 할 일이 생겼는데 김국진씨가 없었다.
그래서 딴 사람이 이 박사 승용차를 운전하도록 했더니, 이 박사는 『그 사람 불러와, 국진이 아니면 차 안 타겠어. 그 사람 아니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라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김씨를 찾느라고 온통 법석을 부리며 진땀을 뺐다. 김씨를 찾아내 김씨가 차를 운전하자 그때서야 이 박사는 차에 올랐다.
이처럼 김국진씨는 운전을 잘해서 이 박사의 신임을 얻었고 출세도 빨라 경무대 경찰 서장이 됐다. 김씨는 서장 재직 때 이 박사의 지시로 고급 공무원과 주요 인사들의 신원 조사 「카드」를 만들었다. 약 3만명을 넘는 인사들의 완전한 인사 「카드」를 만들어놓아 대통령이 어떤 인사를 요직에 기용할 때나, 또 다른 필요가 있을 때 신원 조사를 의뢰하면 재빨리 보고할 수 있게 해두었다.
이 박사가 12년 동안 경무대에 있는 동안 기용된 수많은 인사들은 모두 경무대 경찰서 신원 조사에 합격한 사람들이었다.
김장흥씨나 김국진씨는 조용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당 말기 김국진씨 후임으로 경무대 경찰서장이 된 곽영주씨는 활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곽씨는 초기에 경사로 있었는데 총을 잘 쏘아 이 박사 승용차를 「에스코트」하는 「지프」에 타고 집 총하고 다니던 경호관이었다.
곽씨는 서장이 된 후 얼마 안되어 경무관으로 승진했는데 그때부터 세도를 부리며 천하를 호령했다. 그래서 주위의 핀잔을 많이 받았지만, 안하무인격이었다. 결국 4·19 때 오명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경무대 경찰관들은 일반 서원들보다 승진이 빨랐다. 경무대에 근무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경찰들과 업무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승진이 빨랐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 박사의 생신이 되면 이 박사나 「마담」은 가장 즐거운 날이었지만, 서원들도 고대하는 날이었다. 생신을 맞이하게 되면 으례 승진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경무대 서원이라고 해서 한꺼번에 모두가 승진하는 것은 아니었고, 매년 몇 사람씩 대통령 생신을 기해 승진했었다. <계속>

<고침>
지난 회 (일부 지방)에 게재된 이 박사의 한시집 「찬역집」은「체역집」의 잘못이므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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