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심각해지는 경제 빠져나갈 비상구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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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경기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정부도 경기 둔화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민.관 연구소들은 이미 위기 국면으로 진단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는 "지난해 하반기만 해도 올 상반기까지 경기가 주춤하다 하반기부터 살아나는 일종의 작은 경기 사이클을 예상했는데, 최근 상황을 보니 하반기 회복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LG.현대.한국경제연구원 등은 올 경제성장률을 5%대에서 4%대로 수정할 방침이다. 금융연구원은 경기 하강 국면이 앞으로 6~7개월, 길면 1년 정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대책은 마땅치 않다.

미.이라크 전쟁, 북한 핵 등 불안한 대외 여건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고, 대내적으로도 부동산 과열, 가계대출 급증의 후유증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재정의 조기 집행과 투자 활성화에 주력한다는 방침이지만 효과를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다 새 정부의 경제정책이 불확실하다는 점이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헷갈린다. 시장과 기업이 갈피를 못잡고 있다. 부양인지 긴축인지, 친(親)노동인지 친기업인지, 정책실장과 부총리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되는지 확실한 게 하나도 없다. 경제부총리가 한 말을 대통령이 뒤집는 식의 혼선은 불안감만 준다. "(김병주 서강대 교수)

"거시.산업정책이 제대로 이뤄지는 게 없다. 경기 대책보다 시장 참여자들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게 급선무다. "(현대경제연구원 박동철 실장)

◆ 최악으로 치닫는 경제 상황=요즘처럼 거의 모든 지표가 악화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1997~98년 외환위기 이래 처음"이라며 "실물과 금융이 서로 맞물리며 악순환에 빠지는 모습"이라고 했다.

2001년 정보기술(IT) 침체 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지적이다. 그 때는 물가와 수출입은 그럭저럭 괜찮았고, 미.이라크 전쟁이나 북한 핵 문제 같은 대외불안 요인도 없었다.

지금은 가계 부실과 부동산이 시한폭탄이다. 경기 침체로 버블이 꺼지면 부동산 가격 하락→부동산 담보 대출 부실→금융기관 부실, 가계 파산의 일본식 불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수출이 매달 20% 이상씩 증가하며 괜찮았는데, 전망은 밝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는 "반도체 가격 하락으로 교역조건이 악화되고 있고, 지난해 수출이 크게 늘어나 올해는 전년 동기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증가율이 떨어질 것"이라며 "2분기부터 수출 증가율이 둔화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내부적으로는 조그만 돌발사태에도 경기가 급속하게 위축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이라크 전쟁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가 관건"이라며 "4~6주 안에 끝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경기 속도 조절도 실패=지난해 경기가 회복될 때 정부가 속도를 조절하지 못한 게 큰 실수라는 지적이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지난해 콜금리를 제때 올리고 재건축 허가요건을 서둘러 강화했다면 부동산과 가계 대출이 이렇게 큰 짐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DJ 경제팀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금리를 올렸으면 요즘처럼 경기가 안좋을 때 금리를 내리는 정책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금융.재정정책의 양 날개 가운데 금융정책은 무용지물이 됐다. 주택 건설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는 고전적인 부양책도 쓸 수 없는 실정이다.

정부의 시행착오는 새 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재경부가 투자를 살려보려고 '법인세율 인하'라는 애드벌룬을 띄웠으나 갑자기 대통령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기업과 시장의 불안감만 커졌다.

◆ 대책은 없나=정부는 금융정책을 쓸 수 없는 만큼 재정정책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효과는 제한적이다.

기획예산처 관계자는 "재정 조기 집행은 경기가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것을 막는 안전판은 되지만 경기 회복을 앞당기는 적극적인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2001년 상반기에는 재정의 41.5%가 풀렸다. 정부는 올 상반기에 51.6% 집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추경예산을 편성해 사회간접자본(SOC) 등에 투자하는 방법도 있지만 재경부 관계자는 "하반기에나 쓸 마지막 카드"라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수석연구원은 "섣부른 재정 확대나 금리 정책은 오히려 화를 부를 수도 있다"며 "가계대출과 부동산의 연착륙에 주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정 정책 외에 정부가 기대를 거는 것은 투자 촉진이다. 투자 관련 각종 규제를 과감히 없애 투자를 유도하자는 것인데, 이달 안에 관련 대책을 확정할 방침이다. 그러나 시장참여자들의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여건을 만들어도 투자가 늘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LG경제연구원 이윤호 원장은 "새 정부가 기업 관련 제도를 도입할 때는 현실 여건에 맞도록 속도와 시기를 조절함으로써 기업의 투자 의욕을 부추겨야 한다"며 "특히 새 제도를 미리 예고해 기업들이 적응할 여유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현곤.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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