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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 난의 성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홍경래 난(1811년 12월 18일∼12년 4월 19일)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일인 소전성오의 『신미 홍경래 난의 연구』(1934)가 학계의 지배적 학설이었다.
즉 혁명의 주체자를 홍경래로 보고 그 개인의 가계를 추적하고 사색 당쟁과 관련지어 규명하는데 중심을 두었다. 따라서 그후 조용훈의 『홍경래』도 그 테두리를 벗지 못하고 이 난을 불평관인·상인·서리 등의 민란으로 규정했으며 홍이섭·김철준·손보기 공저의 『영문 한국사』도 이를 농민 봉기로 보았다.
이에 비해 정교수는 당시의 죄인 공초기록인 정만석의 『계첩 기략』은 물론, 최근 일본 국회 도서관에서 찾아낸 조종영의 『관서평란록』 18책의 복사본을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19세기 초 순조 연간의 사회적 배경이 반봉건 시기로서 농민 가운데 부를 축적한 경영형 부농층이 대상들과 결탁, 지휘부를 형성해서 광산 노동자를 동원, 혁명을 일으켰던 것으로 분석했다.
향임·무임 층의 참여로 적어도 60∼1백명의 지휘부가 합의적으로 통수 체계를 가졌으며, 홍경래가 단독 주제 한 것은 아니었다.
난의 하층부는 농민이 아닌 광산 노동자들로 당시 평안도 지역에 성행하던 잠채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난군의 주체인 홍경래·우군칙·김창시·이희저·김사용 등은 사회의 불합리를 가장 잘 알고 행동으로 극복하려 한 지식층이었다.
10년에 걸친 계획 끝에 이루어진 거사였으나 속전속결에 의해 황해도·평안도를 점거해서 7년에 걸쳐 수행하려던 전략은 지휘부의 분열에 따른 지연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실패의 원인으로 특히 농민의 참여가 없었던 것이 크다. 관군의 초토화 전술, 약탈 행위 때문에 난의 후반엔 농민들이 반군에 가담해서 정주성을 거점으로 끈질긴 저항을 했지만 난의 시작을 농민의 기반 위에서 닦지 못했던 것이 큰 약점이었다. 또 설득력 있는 혁명 강령을 내세우지 못한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 난을 차별 대우에 대한 서북인의 반항, 서북인의 저항적 기질, 또는 노론·소론·시파·벽파 등 당쟁의 여파 등 관점에서 본 것을 전혀 배제하진 못하나마 사회 경제사적 측면에서 특히 분석하고 있다.
농민층의 분해를 포함하는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지방 향무의 저항은 사회 구제를 위한 정장군 설화를 내세워 혁명의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자발적 강령을 통한 농민층의 적극적 호응을 못 받아 실패했지만 그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백성들이 자기의 힘을 의식하고 용감히 관가에 호소할 줄도 알게 되고 심하게 대적화 태세도 취할 수 도 있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석종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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