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분노의 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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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너희 이웃이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마저 내어주라고 외치던 예수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에게 채찍을 들어 분노하였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고 그토록 강조하던 예수가 채찍을 들어 분노하였음은 웬일일까? 아마도 예수가 채찍을 들어 내려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랑을 부정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너무나 사랑을 강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교만, 가식, 허영, 퇴폐, 무질서, 시기, 질투, 태만이 모든 것들을 예수는 증오하였다. 그러한 증오와 혐오의 대상들이 난무하는 풍토에서 허덕이는 이웃과 형제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아량을 촉구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정신은 이웃들이 생활하는 사회풍토가 마치도 성전이 장사치들에 의하여 더럽혀지듯이, 더럽혀 지는 것에 대한 격렬한 분노로 표시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가냘픈 여성들의 분노는 행주산성에서의 행주치마로 표시되었고, 유관순의 침략자에 대한 분노는 민족에 대한 숭고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국난의 시대에 있어서 무엇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이웃간의 사랑과 연민의 정이다. 또한 사회를 좀먹는 모든 부조리에 대한 격렬한 분노의 정신만이 어려움에 처한 동포들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기도 하다.
여성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산모의 진통을 겪으면서 위대한 사랑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무서운 진통을 겪으면서도 태어나오는 새로운 생명체인 자기의 분신을 바라보면서 만족감과 희열을 느낀다. 그때부터 여성은 모성애라고 하는 무한한 「에네르기」를 발산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다. 즉 20세기 초 일본이 노일전쟁을 전개하며 한참 맹목적인 애국심을 선동하면서 군국주의에로 치달리기 시작할 무렵 노일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한 여성이 비애 속에 잠겨 여성은 피맺힌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키우는 것은 전쟁터에 보내기 위하여서인가 라는 내용의 시를 썼다가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혔다는 이야기다.
하나의 모성애가 일찌기 일본군국주의의 출현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멀리 싸움터에 남편과 자식을 보낸 여성들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던 비애를 노래한 것일 것이다. 가혹한 탄압을 무릅쓰고도 그 여성은 한 줄의 시에서라도 그 비애와 사랑의 정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위대한 「에네르기」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무한한 사랑의 「에네르기」가 동물적으로만 작용할 때 사랑하는 자식이 불량만화의 횡포 속에 숨져 가는 것도, 난무하는 차량에 목숨을 빼앗기는 것도, 숨막히는 혼탁한 공기 속에서 병들어 가는 것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과 사랑하는 자식과 이웃들이 함께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병폐와 부조리에 분노할 줄 모르는 눈감은 여성이란 인간적 사랑의 정을 갖추지 못한 증거라 할 것이다. 사랑의 논리, 분노를 상실한 여성은 아름다울 수 없다. 아무리 얼굴을 곱게 단장하여도 희칠한 무덤같이…. [이성근<명지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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