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취한 천만 원을 딱한 사람에|「현대판 임꺽정」…그 행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구=김탁명 기자】1년 11개월 동안 공중전화를 이용, 관공서의 간부와 기업체의 사장 족 부인들을 상대로『주인이 부정에 관련, 입건되었다』고 속여 사건수습을 미끼로 1천여 만원을 사취해오다 지난 7일 하오2시 덜미를 잡힌 김영철(30·부산시 연산 동3구1820)은 뺏은 돈 거 의를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불우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엉뚱한 청년이었다.
지난7일 하오2시10분쯤 대구시 내당동 모 유지공업 사 사장 박 모씨(39) 집에 전화를 걸어 박씨의 부인 김 영자 여인(35)에게『남편이 부정사건으로 경찰에 연행되었으니 수습 비로 돈 50만원을 갖고 만 경관 극장 앞으로 나 오라』는 전화를 건 뒤 가짜 돈 뭉치를 갖고 나온 김 여인의 이종사촌 오빠 이성렬씨(39)에게 목덜미를 잡히기까지 김은 70년 5월10일 대구에서 모 중학교 교장부인에게 16만원을 사취한 것을 비롯, 대구에서 8차례 부산에서 7차례 모두 15차례에 약 1천 만원을 사취했다고 검찰에서 자백했다.
경찰에 잡히자 김은 처음에는 뺏은 돈으로 노름과 술과 여자에게 모두 탕진했다고 말했으나 경찰의 현장검증에서 김의 진술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대구 경찰서 박호경 형사(39)와 최길수 형사(32)가 김을 데리고 부산시 연 산등3구1820 김의 집에 가자「라디오」의「뉴스」에서 김이 거액의 전화사기범으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은『김영철씨는 우리의 은인입니다. 김씨 대신 우리를 교도소에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소연하면서 그 동안 김씨로부터 도움을 받은 내력을 털어놓았다.
김은 그때서야 경찰관들에게 자기가 뺏은 돈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남모르게 써왔음을 실토했다.
김이 맨 처음 뺏은 돈을 불우한 사람들에게 쓴 것은 70년 8월 부산시 중앙동 육교 앞에 맹장염으로 쓰러져 있는 구두닦이를 발견, 인근 병원으로 데려가 수술을 받게 하고 수술비로 4만원을 내고 나온 것이다. 그 구두닦이는 지금도 은인이 누구인지도 모른단다.
부산시 괴정동 5통4반 이창욱 노인(61)의 아들 이호철씨(24)는 11년 전 동네아이들과 모조품 엽 총 놀이를 하다가 동네아이가 쏜 총알로 부러진 비녀(길이 5㎝가 눈썹 위를 뚫고 들어가 비녀조각이 뼈 속에 박혀 11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부산의 모 신문이 독지가를 구하는 기사를 냈다.
71년 3월19일자 신문에서 이씨의 딱한 사정이 실린 기사를 본 김은 3월24일 이씨 집을 찾아가『국제시장에서 왔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대로 30만원이면 수술을 끝내겠지요』하면서 현금 30만원을 방안에 던지고 사라졌다.
더구나 의외의 일에 돈준 사람의 신분도 확인 못했던 이씨 가족은 이 돈으로 서울「세브란스」병원에서 이호철씨의 수술을 끝내고 보름만에 집에 돌아와 생명의 은인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끝내 찾지 못하다가 9일 형사와 함께 자기 집에 들른 김을 보고는 김 대신 자기부자를 함께 유치장에 보내달라고 울며 매달리기도.
현대판 임꺽정을 자처하는 김은 경북 의성군 봉양면 장대동이 고향, 농사를 짖던 김팔용 씨의 6형제의 세 째로 태어나 10세 되던 해에 대구로 가족과 함께 나와 대구 수 창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토성중학을 졸업, 대구 영남고등을 중퇴한 뒤 서라벌예대 성악과에 들어가 2년 동안 다니다가 돈이 없어 그만 두었다.
64년 대구방송국주최 경북도내 노래자랑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서울「오메가·레코드」회사에서「설어워」라는 노래까지 취입한「아마」가수 김은 2년 동안 가수생활을 하다가 군에 입대, 26세에 제대한 뒤 1년 동안 놀다가 69년 C일보 부산지사 업무사원으로 있다가 작년 12월말에 그만두었다.
평소 성격이 온순하고 어려운 일을 보면 그냥 못 있는 성질이라고 주민들은 경찰의 현장검증에서 입을 모아 김을 동경했고 김의 도움으로 병을 치료하고 있던 김서우씨(32)는『김이 없으면 나는 죽는 몸이다』『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나를 대신 잡아가 달다』고 호소했다.
10일 상오9시 대구경찰서 형사 실에서 기자들과 만난 김은『사회의 빈부의 차가 너무 심하고 부정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잘살고 있는데 역겨움을 느끼고 이들의 돈을 뺏어 가난한사람을 도와주려 한 것』이라고 자기 범행동기를 밝히고 자기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11일 대구변호사회 소속 김 성대 변호사는 김을 위해 무료로 변호를 맡겠다고 알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