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제자 윤석오>|<제26화>경무대 사계(57)|황규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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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신당의 태동>
성재가 사전에 아무 협의 없이 부통령 사임 서를 국회에 제출한 것은 이 대통령을 극도로 자극했다. 특히 성재의 정부비난으로 이대통령은 대노했다.
며칠 후 이부통령의 사임서와 관련하여 국회대표의 방문을 받은 이대통령은 성재의 사표가 수리돼도 좋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부통령이 현정부에 만족치 않아 나가 신다니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아. 나가는 것이 그이로 하여금 마음을 평안히 해드리는 것이니 어떻게 다시 계시라고 하겠소. 나는 부통령 사임에 관해 공식적으로 국회에 나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통령 사임서는 국회표결 결과 재 석 1백37명중 가 1, 부 1백l5로 일단 반려됐다.
그러나 성재는 사의를 굽히지 않았다. 자기가 바라는 국정쇄신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대통령도 사표수리가 타당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찌 번의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국회는 이시형 부통령의 사표를 수리하고 5월16일 후임 부통령에 민국당 최고위원인 인 촌 김성수 선생을 뽑았다.
부통령선거는 상당히 혼전이어서 3차 결선투표까지 갔다.
이 대통령은 1차 조각 때 자기가 추천한 재무장관직을 맡지 않은데다 민국당이 야당성향을 뚜렷이 했기 때문에 인 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를 특별히 부통령으로 밀지는 않았으나 행정부와 이 박사를 지지하는 원내세력은 이갑성씨를 밀었다. 3차 결선투표의 득표결과는 재 석 1백52명중 인 촌이 78, 이갑성 씨가 73표였다.
인 촌의 당선소식을 들은 대통령은 부통령이 정부를 비만했던 아픈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쐐기를 박는 담화를 냈다.『김성수씨가 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환영하며 국회에서 이같이 유능한 인사를 선출한데 대해 감사히 여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피선이전에는 일 야인으로서 정부를 자유로 비판도하고 비난도 할 수 있으나 피선된 이후에는 정당이나 또는 개인적 정견을 떠나서 정부를 일심으로 육성하기에 일치 노력하는 것이 정치도의며, 또 그렇게 되기를 믿는 바이다.』새로 부통령이 된 인 촌은 진해별장으로 대통령을 방문했다. 두 분은 별장 정원에 앉아 오랫동안 환담했다. 내 기억으로는 두 분이 단들이 만난 것은 인 촌의 l년 남짓한 부통령 재임 중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보다 앞서 이미 4월11일「유엔」군 총사령관이던「맥아더」장군은 본국 정부와의 계속된 의견충돌로 해임됐다. 후임에는「리지웨이」장군이 승진되고, 8군사령관에는「밴플리트」중장이 임명됐다.
「맥아더」장군의 해임은 이대통령과 대한민국에는 큰 지주의 상실이었다.
이때부터 이 박사는 통일희망의 꺾임과「유엔」참전 우방이 한반도의 현상을 동결하려 할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 우려는 적중했다. 이해 6월23일 소련의「유엔」대표「말리크」는『38선으로 양측의 군대를 철수하기 위해 휴전회담을 하자』고 제의했다.
이 대통령은 27일「말리크」의 제안에 반대하는 담화를 냈다.『어느 인위적 경계선을 가지고 이 나라를 분할하는 조건이 포함된 소위 평화 안은 어느 것이고 간에 남북 전 한 국민이 도저히 수락할 수 없다. 이런 제안은 이 나라에 대한 모욕이다. 우선 첫째 전 한 국민은 민족통일을 원하며 둘째 한 국민에 대한 공산침략이 장차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을 주고 세 째 한국정부를 통해 한 국민이 화평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계속 협의를 받고 정보를 받는다는 조건이 공산 측에 수락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대통령의 단호한 반대에도 불구하고「트루먼」미대통령은「리지웨이」사령관에게 정전교섭을 지령, 한국의 의사와는 별개로 휴전회담이 추진됐다 .한편 국회의 정치적인 성향이 차차 야당 화 해가자 대통령은 이즈음부터 자기를 지지하는 신당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박사는 이조시대의 사색당파의 폐를 느껴서인지 초기에는 정당 정치를 기피했었다. 신당의 필요성을 생각하면서부터 주위사람들에게『요새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당 하는 방법을 몰라. 그러니 내가 정당을 만들어 당을 하는 본보기를 보여주어야겠어』란 말을 자주 했다.
이 대통령은 드디어 광복절 기념사에서『농민과 노동자를 토대로 삼아 일반국민이 나라의 복리와 자기들의 공동복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당한 정당을 만들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자유당창당의 시발점이다. 처음엔 당명을 자유당으로 하지 않고 노동자농민을 위하는 당이라 해서「노동당」이라고 부르려 했다. 그러나 채규항씨 등 창당간부들이『노동당은 공산주의적인 냄새가 풍긴다』는 의견을 제시해 후에 자유당으로 바꾸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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