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당연한 대한민국 관할" UN서 묵살 우리 행정관 있어도 실권은 「군정」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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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수복지 통치
평양탈환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작전은 더욱 순조롭게 진행됐다. 적의 완강한 저항이 예상됐었으나 괴뢰군은 의외로 맥없이 신의주로 달아났다.
당시의 추세로 보아 연말까지는 북한전역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판단은 우리정부나 「유엔」군측이나 마찬가지인 듯 했다. 「맥아더」원수도 10월21일 한국전쟁은 이제 끝나가고 있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소련과 중공군의 한국전개입의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맥아더」사령관은 「유엔」군에 「크리스마스」전까지 북한전역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유엔」군 총사령부는 북한에 대한 점령후의 군정실시문제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사실 북한땅의 수복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이 지역의 행정을 어떻게 실시하느냐는 큰 문제였다.
이박사는 이북의 수복지역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관할하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조병옥 내무장관을 통해 북한시정방침을 밝히고 북한에 파견할 행정책임자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0월15일 태평양상에 있는 「웨이크」섬에서 「트루먼」미대통령과 「맥아더」사령관이 만나 한국전쟁수행에 관한 회담을 하고 있었다.
이박사는 이들에게 항의전문을 보내고 북한지역에 잠정적으로 「유엔」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될 경우 한국정부가 인사에 참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엔」한국소위는 10월12일 『점령하의 북한을 「유엔」군 총사령관이 통치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10월21일 평양에 군정이 실시된 것을 비롯하여 점차로 북한수복지구에 「유엔」군의 군정기구가 설치됐다.
이로 인해 우리정부가 파견한 행정직원들과 「유엔」군정기관간에 마찰이 생겼다. 이미 북한에 파견됐던 우리경부의 행정직원은 되돌아오거나 「유엔」군정에 편입되어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한가지 예로 평남도의 경우 지사가 두 사람이 임명되어 말썽이 일어났다.
「유엔」군으로부터 평남지사에 임명된 김성왕씨는 10월26일 선발대를 이끌고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행려관에 도청을 마련, 12월4일까지 행정을 실시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에서 평남지사로 임명했던 김병연씨가 금성왕씨와 서로 도정을 맡겠다고 하여 담판이 벌어졌다. 결국 평남이 미8군 주둔 지역이어서 감병연씨는 밀려나고 말았지만….
당시 평남에는 금성왕지사 외에 미8군 민정장관인 「R·먼스키」대령과 헌병부사령관으로 평양지구를 맡고있던 김종원대령이 있어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았다. 세 사람이 서로 실권을 행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심지어 중공군의 개입으로 피난을 가게 됐을 매도 서로 의견이 엇갈려 말썽이 있었다.
11월27일 「먼스키」대령은 평양시민들을 피난시키라고 도에 시시했는데 김지사는 정세를 보아가며 더 버티겠다고 반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먼스키」대령은 자기부하들을 시켜 시민 피난을 떠나라고 벽보를 써 붙였고, 도에서는 뒤따라 다니며 벽보를 찢었다는 얘기였다.
결국 12월4일 행정책임자들도 평양을 떠나게 됐지만 한달 남짓한 북한군정은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들어가자 일부 지방민들간에 보복행위가 자행되어 무법천지 같은 곳도 있었다. 경무대로 들어온 보고 가운데는 일부지역에서 지방 원주민들로 조직된 임시치안대가 멋대로 보복을 하는 등 행패가 심했다는 것이다.
빨갱이를 보복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애매한 사람까지 빨갱이로 몰아 자기네들 마음대로 처단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양에 이어 원산을 방문한 이박사까지 시민환영대회에서 이를 중지하라고 했다. 이박사는 『통일된 이 마당에 과거의 강제된 사장으로 저지른 죄과는 관용하고 일체 보복을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러는 가운데 국군과 「유엔」군은 11월21일 한만국경지대인 혜산진을 점령하여 통일은 실감있게 눈앞에 다가섰다.
이 무렵 이대통령은 신성모총리서리 대신에 장면박사를 총리로 임명, 국회에 인준을 요청했다.
전시하에서도 행정부와 국회는 빈번히 대립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박사는 이범석총리사임 후 신총리서리를 임명한 채 6·25후 5개월이 지나기까지 총리에 대한 임명동의를 받지 않고 서리임명으로 버티었다. 이를 두고 국회에선 국회의 총리인준권 무시라해서 비난과 압력이 계속됐다.
그러자 이박사는 백악준문교장관을 총리로 지명해서 국회에 동의를 구했고, 국회가 인준을 거부하자 백문교를 재지명해서 재인준을 요청했다.
이 처사에 항의해서 국회는 국회대로 인준투표를 거부하고, 그 대신 국무위원총사퇴결의안을 제안해서 정면대결태세를 취했다.
이렇게 되자 백문교 자신도 어려운 지경에 빠졌고, 결국 이박사도 고집을 꺾어 백문교에 대해선 본인이 사양한다는 이유를 붙여 인준요청을 철회했고, 국회도 불신임안을 철회, 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 후 11월23일 이박사는 6·25당시 주미대사로서 「유엔」군의 출병과 미국의 대한원조에 공이 많았던 장면주미대사를 국무총리로 임명, 국회의 인준을 얻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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