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는 해방의 언어 … 우주 안드로메다 어딘가가 내 고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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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집을 엮으며 버린 작품은 없었냐고 묻자 고은 시인은 “거의 없다. 그게 나의 결점”이라고 했다. [뉴시스]

‘시가 시이고 또 시였다. 내가 감히 시였다’ (‘안성을 떠나면서’)

 스스로 시가 되지 않고선 감당할 수 없는 무게다. 고은(80) 시인이 607편, 1016쪽에 달하는 신작시를 묶어 『무제 시편』(창비)을 펴냈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와 연시집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을 낸 지 2년 만이다. 놀라운 것은 이 방대한 분량을 올 봄과 여름에 집중적으로 쏟아냈다는 것이다. 매일 평균 서너 편을 쓴 셈이다.

 고 시인은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창작의 동력을 묻는 질문에 “시에 관한 한 밤과 낮이 없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도, 직사광선이 퍼붓는 날도 시의 시간이다. 전천후(全天候)가 내 시가 있는 장소”라고 답했다.

 신작 시집은 제목 없이 숫자만 매긴 ‘무제 시편’ 539편과 ‘부록 시편’ 68편으로 구성됐다. 제목을 달지 않은 이유를 묻자 “시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고 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시가 그 이름에 갇혀버린다는 것이다.

 “내 시는 해방의 언어예요. 어떤 명제나 이데올로기, 고유명사에 속한 진술행위가 아니지요. 시에게 자기 운명을 개척하도록 하자는 의미였어요.”

 자유분방한 태도처럼 그의 작품도 시공간을 초월하며 방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달의 맹방(盟邦)임을/새삼스러이 선언’(무제 시편3)하고 ‘나의 고독은 명왕성의 고독을 안다’(무제 시편11)고 했다.

 “우주 도처가 내 고향입니다. 지구도 태양계도 내 고향으로 삼지 않습니다. 안드로메다 어디입니다.”(웃음)

 시인의 실제 삶도 국경을 초월한다. 올 초 경기도 안성에서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사를 했지만 몸은 세계 각국에 걸쳐있다. 올 봄엔 이탈리아 베니스에 체류했고, 가을엔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유럽, 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초청장이 끊이질 않는다. 이날 간담회에도 영국 BBC 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시인을 밀착 취재 중이었다.

 “나는 정말 ‘로드무비’예요. 어린 시절에 기차·돛단배·새만 그렸더니 아버지가 ‘너는 어딜 떠나는 것만 그리느냐. 집이나 마을을 그려보라’고 할 정도였어요. 절간 처마에 달린 물고기 풍경(風磬)처럼 집에 있으면서도 바다로 가는 것, 그런 모순이 내 안에 있어요.”

 시인의 창작열과 반대로 시를 읽지 않는 세태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하지만 그는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시의 황금기’였으므로 지금은 고개를 숙여야 할 때란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시대에 시인인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다.

 “‘시가 다 끝났다’가 아니라 이제 나는 시를 소생시키겠습니다. 이 무력이야말로 내 최고의 운명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는 간담회 자리에 오기 전에 부끄러워서 소주 2병을 마셨다고 했다. 책 날개에 적힌 약력도 『무제 시편』이란 제목에 걸맞게 단 두 줄이었다. ‘고은. 시인 생활 55년. 시집 여럿’

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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