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냐 주사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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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매년 이맘때가 되면 꼭 생각나는 일이 있다. 추위가 가시고 얼음이 녹으려할 때면 나는 선친을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천 상륙 때의 폭격으로 척추에 파편을 맞으신 아버지는 그 후 하반신이 마비되어 17년 간을 침대에 누워 계셨다.
그는 보기 드문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고 병상에서도 매일 정시 정각에 일정량만의 음식을 드시면서 규칙적인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셨기 때문에 뼈대가 쑤시고 다리가 뒤틀려도 참음과 절제로 고된 삶을 이어 가셨다. 그것은 엄격한 신병 훈련보다도 더 철저한 일과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정신적인 충격을 심하게 받아 병상에서조차도 일어나실 수 없게 되었다. 그때의 상황으로 보아 살려는 의지만 가지셨더라면 능히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인데 자식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삶을 단념하셨음을 나는 분명히 얘기 할 수 있다. 나는 의사들을 불러다가 계속 「링게르」 주사를 놓게 했다. 약할 대로 약해져서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는데도 주사 바늘이 일제라는 걸 알아차린 그는 「링게르」 주사 바늘을 당장 빼버리시고는 죽어도 왜놈들에게 신세 지지 않겠다고 하셨다. 일제라면 일체 손대지도, 잡수지도, 걸치지도 않던 분이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항일의 자세를 굽히지 않으신 것이다. 쓰라린 옛 추억이 그의 머리들 그토록 굳게 다듬었으리라. 혈관이 자꾸만 터져 주사조차 놓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아들에게 허울 좋고 효도의 기회를 주기 위해 그 고난을 참으시며 「링게르」를 놓도록 몸을 내맡기신 것이다.
점잖은 어느 아주머니가 마지막 가시는 분을 그렇게 괴롭히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며 고통을 지속시켜 드리는 것이 오히려 불효가 되지 않겠느냐고 타이르기까지 했다. 어떤 선배는 그럴 때는 안락사라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만한 일인데 자연사의 길을 막으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느냐 면서 이럴 때는 감상적이 아니라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덧 붙였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의 말도, 의학 박사의 인술도, 심지어는 아버지의 의지조차도 믿지 않고 다만 그 어떤 막연한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그렇게도 반대하시던 입원을 자청하셨다. 그리고는 병원에서 숨을 거두셨다. 당신의 시체를 집밖으로 운반케 하여 자식의 부담을 덜어주시려는 배려까지 하신 것이다.
장례식은 될수록 간략하게 치를 것, 추후에 비석을 세우려면 시간과 돈이 들것이니 미리 작게 만들어 가지고 영구차에 싣고 갈 것, 그리고 상복은 일체 만들지 말고 보통 옷에 완장만 두른 것 등의 주의 사항 이외에 부고 보낼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집안 일을 돌보지 않았기에 말도 못하시고 눈도 안보이시는 최후의 순간에까지 그런 걱정을 하시게 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후회가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자연사와 안락사의 길을 터 드렸어야 옳았을까, 아니면 효도라는 구실로 죽음을 각오하신 아버지를 끝까지 괴롭혔던 것이 과연 이성적이었을까?
매년 이 맘 때가 되어 추위가 물러가고 얼음이 녹아 내리기 시작하면 나는 그렇게 꿋꿋한 아버지를 또 한번 생각하며 그토록 불효한 스스로를 뉘우쳐 보는 것이다. 아버지!
이창건 <원자력 연구소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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