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안희정, 친노에게서 발견한 희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전영기
논설위원

분열의 시대입니다. 통합적 인물이 그립습니다. ‘분열하는 집안은 일어설 수 없다’는 말이 있지요. 한국이 분열의 덫에 걸려 이대로 주저앉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연히 안희정(48) 충남지사의 책을 접한 건 기쁨이었습니다. 안 지사는 ‘노무현의 동업자’로 불릴 만큼 뼛속까지 친노입니다. 대체로 친노 정치는 정의의 이름으로 진영을 만들고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독선과 분열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를 부끄럽게 여기는 자학적 역사관도 갖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그들의 미움과 분노는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친노의 이런 특성들을 안희정에게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라는 책에서 그는 한국의 단결과 역사의 화해, 미움과 분노의 극복을 호소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학창 시절의 나는 사대주의의 역사를 부끄러워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변방의 강역을 보존하기 위해 굴욕을 마다하지 않은 이 땅의 지도자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사대의 외교술이 없었다면 조선시대의 어느 한순간도 이 땅 위에서 온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련과 미국이라는 초강국 사이에서 내일을 도모하며 주권을 지켜낸 지도자들에게 존경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비루한 역사가 아니라 한과 눈물로 지켜온 역사다. …정말로 극복하고 싶은 건 분열이다. 우리는 분열할 때 수난을 당했고, 단결할 때 주권과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253~254쪽)

  안희정은 1980년대 반미청년회라는 지하 학생운동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전대협의 배후 조직입니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퍼진 반미주의의 씨앗을 뿌린 셈이죠. 세월이 흘러 그의 인식은 다음과 같이 바뀝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힘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동맹관계를 약화시키거나 철회하는 잘못을 범해선 안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재앙이다. …이미 동맹을 맺은 미국이라는 자산을 훼손하면서 중국을 향해 서둘러 구애하는 것은 바람직한 외교정책의 전환이 아니다.”(255쪽)

  안희정은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보냅니다. 친노의 일반 정서가 김대중·노무현 이외의 대통령을 제대로 된 지도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과 다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출범시킨 지도자로서 공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역량을 결집해 산업화에 성공했으나 아무리 찬양해도 공칠과삼(功七過三)을 넘지 않는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 전두환 대통령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이지만 중요한 역사적 전환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외교를 적절하게 추진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군사독재의 폐해를 청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북정책을 통합해 나가는 중요한 시기적 역할을 수행했다.”(8~10쪽, 69~74쪽)

  안희정은 친노지만 노무현에게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을 역사 속으로 놔 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노무현을 붙잡고 있는 건 과거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친노라는 이름으로 이득 보려는 정치도 하지 말고 과거를 공격해 덕 좀 보려는 정치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지금 국회의원들이 모여 있는 중앙정치가 노무현을 공격하는 편과 노무현을 방어하는 편으로 쫙 갈려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 모습 좀 보십시오. 같은 친노라도 문재인 의원은 노무현의 과거에 갇혀 무겁고 둔탁하지 않습니까. 반면 안희정은 자유로운 정치적 상상력으로 ‘한국의 단결’을 꿈꾸고 있습니다. 노무현과 컨셉트가 다릅니다. 대한민국의 단결이라는 꿈을 잡아낸 건 그가 분열의 중앙정치에서 해방됐기 때문입니다. 지방 도지사로서 ‘땅 위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키운 꿈일 것입니다.

  “분노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은 극단적인 대결 속에서 뒷걸음질치다가 또 다른 독재자형 지도자를 만나거나, 아니면 그냥 서서히 몰락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25쪽) 분열병은 30년간 이 사회를 지배해 왔던 운동권 문화의 어두운 측면입니다. 뼛속까지 운동권, 뼛속까지 친노인 안희정이 이 한국병과 어떻게 싸워 갈지 흥미롭습니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