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04)<제26화>경무대사계(31)|고재봉<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중앙청 집무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통령비서실 직원은 이 박사 말대로 완전히 「사비서」였기 때문에 4·19가 날 때까지 발령장 없이 일을 했다.
정부의 부처에서 일하던 사람이 비서실로 들어올 때도 공무원을 그만두는 면직발령은 있었지만 새로 임명장을 받고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대통령은 언제나 아침 일찍 경무대에서 중앙청으로 출근하여 국무를 처리했다. 출근시간은 항상 정확하게 아침 9시였다.
서류결재를 받을 때는 중요한 것은 미리 「메모」하여 내도록 되어있었다. 이 박사는 서류결재에 도장을 사용하지 않고 「가만」이라고 「사인」을 했다.
면담도 가능한 한 중앙청 대통령집무실에서 했으며 외국사람을 비롯해 특별한 경우에만 경무대서 요담하기도 했다.
그래서 경무대 비서실보다는 항상 중앙청비서실이 붐볐고 비서들도 바빴다. 대통령이 출근할 때는 경무대에 있던 비서들도 중앙청으로 내려오곤 했다.
대통령집무실은 중앙청 2충 가운데에 있는 제일 큰방이었는데 일제 때는 이 방이 조선총독이 썼던 방이다.
대통령실 앞이 비서실장 방이었고 그 옆에 비서실과 경비원실이 있었다. 비서실은 대통령실 이외에 방을 세 개 사용했다.
나는 면담도 담당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오는 사람이 매일 수십 명 씩 몰려와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통에 골치를 앓았다. 이대통령은 보통 하오2시 이후에 면회희망자를 5명 정도 골라서 만났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주문이 너무 많아 대통령은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담」이 『왜 그런 사람들을 면회시켜 그분이 걱정을 하시게 하느냐』고 꾸지람을 했다. 나는 양쪽에 끼어서 정말 욕도 많이 먹었다.
나중에는 면회 희망자 중 「마담」이 면담할 사람을 선정하기까지 했다.
이 무렵 그러니까 49년 상반기는 반민특위 문제와 임영신 상공장관 독직사건으로 물의가 일었다.
국회가 제정한 반민특위 법에 따라 그 해 정초부터 활동을 시작한 반민특위는 일제 때의 친일파로 알려진 이른바 반민 행위자의 전면검거에 나섰다.
특별재판부장에 전병노씨, 특별검찰부장에 권승렬씨가 취임했는데 박흥식씨를 비롯하여 중추원참의를 지낸 최린 방의석, 그리고 이풍한 이승우 박중양, 고등계 형사였던 허덕술 김태석, 또한 문화인 중에서 최남선 이광수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
그러나 사태는 갈수록 험난해져 갔다. 비교적 명사였다는 사람들 중에선 일제 35년간 일본과 아무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온 사람보다는 음으로 양으로 관련을 맺은 사람이 더 많았다.
반민특위에서 범죄를 엄중히 다스리면 다스릴수록 『털어서 먼지 안 나랴』는 식으로 수 없는 사람들이 걸려들 판이었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속출했고 이를 두고 일반의 원성도 없지 않았다.
처음에는 중앙청에 본부를 두고 있던 특위가 남대문로에 자리를 옮기면서 반민 행위자의 체포는 늘어났고 경찰에까지 검거의 손이 미쳤다.
그 해 8월초 돌연 경찰이 특위청사를 둘러싸고 반민특위의 특경대원을 강제로 연행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당시 서울시경사찰과장이던 최운하가 반민 행위자로 특위에 구속된 데 대한 시경사찰과 직원들의 보복행위였다. 경찰은 연행해 간 20여명의 특별대원들을 심하게 구타해서 중상을 입혀 병원에 입원해야했다.
시경사찰과 직원들은 특위에 대한 이 같은 실력행사와 함께 48시간 이내에 특경대를 해산하고 반민 행위자 체포를 경찰에 넘겨달라고 마치 최후통첩 같은 탄원을 경무대에 보내왔다.
군정에서부터 건국초기까지 산당의 갖가지 음모와 파괴활동을 막기 위해선 경험 있는 유능한 경찰요원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일제하에서 다소 친일경향을 띠었다해도 결정적인 반민 행위가 없는 사람들은 많이 기용했었다. 최 과장도 이렇게 기용된 사람중의 한사람이었고 그는 그 동안 남로당의 음모를 적발하는데 많은 공을 남겼다.
경찰의 반발은 최 과장 같은 사람에겐 반공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런 고려도 없이 계속 반민 행위자의 폭을 넓혀갈 경우 경찰을 쑥밭으로 만들고 말지 않겠느냐는 데서 온 자구행위였다.
사태는 경찰과 특경대 간의 단순한 대립이기 보다 정치성을 띠고 복잡하게 번졌다. 김태선 시경국장은 경찰 편에 서서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어떻든 김국장의 노력이 주효해서 이 대립은 경찰이 승리, 특위는 충돌사건 이틀만에 최 과장은 반민법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석방조치를 하고 얼마 후엔 특경대도 해체했다.
이렇게 해서 권위도 떨어지고 손발까지 잘려(특경대 해산) 특위기능도 마비되다시피 되고 반민 행위자 처리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한편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당시 정인진씨가 위원장으로 있던 감찰위는 서슬이 퍼래서 공무원들은 술집도 못 다니는 형편이었다. 공무원 중 술을 마시다 적발되면 명단이 내무장관에게 통고되어 당장 조치가 있었다.
한번은 어떤 비서가 친구의 초대로 신성이란 음식점에 저녁 먹으로 갔다가 경무대에 이 사실이 보고되어 한동안 말썽이 있었다.
만약 이대통령이 알았더라면 당장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감찰위에서 납득이 됐던지 겨우 해결이 됐던 기억이 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감찰위 사람들은 대통령비서실 사람들을 불러내 술집으로 데려갔다.
이것은 대통령 비서실직원 중 누가 술을 얼마나 마시는가를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만큼 감찰위는 극성이었고 대통령비서실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세도를 부릴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통령비서실에 있으니까 대단한 자리인 줄 알고 청탁을 하는 사람이 많아 괴로웠다. 그래서 밖에도 마음대로 나다니지도 못했고 누구 한 사람 마음놓고 만나기도 어려웠다.
심지어는 친구를 만나 『자네 요즘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대통령비서실에 있다는 말을 제대로 못하는 형편이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