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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과정은 목숨 건 전투 … 10년 전 은퇴 뒤 전각에 심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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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81세의 리란칭 전 상무위원은 전각·서예의 창작 활동을 꾸준히 하고 수영·산보로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고 있다. [베이징=장세정 기자]

중국의 최고 권력기구인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7명의 상무위원으로 구성된다. 중국에서 ‘중앙 영도(領導)’로 불리는 이들은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7명의 대통령’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 권력의 정점에서 물러나 유유자적하며 예술에 심취한 인물이 있다. 2003년 3월 국무원 부총리를 끝으로 정치 일선에서 은퇴한 리란칭(李嵐淸·81) 전 정치국 상무위원. 한·중 수교(1992년)를 앞둔 91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장관급 회의 참석차 첸치천(錢其琛) 당시 외교부장(장관)과 함께 대외무역부장 자격으로 방한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을 국가원수 전용 접견실에서 비밀 면담했다.

 그는 “노 대통령이 분명하고 강한 어조로 ‘수교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나는 귀국해 중앙지도부에 보고했고 결국 92년 8월에 수교가 성사됐다”고 증언하면서 “수교는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강조했다.

 한·중 수교에 크게 기여했던 그가 정계 은퇴 후 71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익힌 전각(篆刻)과 서예 작품 전시회를 15일부터 한 달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고 있다.

 전각이란 인장(印章) 조각 예술의 일종이다. 조각칼로 옥·돌·금속·도자기 등의 재료 위에 전서체 한자를 새긴 뒤 붉은 인주에 묻혀 흰 화선지에 찍어내면서 감상하는 고품격의 중국 전통 시각 예술이다. 그는 지난 10년간 1000여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5세 때 서숙(書塾·중국의 서당)에서 배우기 시작한 서예 솜씨도 안진경(顔眞卿)·류공권(柳公權)·황정견(黃庭堅)·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넘나든다.

 중앙일보가 전시회에 앞서 리 전 상무위원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진행됐다.

① 리란칭 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조각칼로 전각 작업을 하는 모습. ② 한국 전시를 위해 한국 문화를 존중하는 뜻에서 세종대왕·아리랑·한라산 등을 새긴 작품. ③‘중·한 문화 교류를 강화해 양국 인민 우의를 증진하자’고 쓴 친필 서예 작품. [사진 리란칭 전 상무위원]

 “전각 예술은 손과 머리를 동시에 쓰기 때문에 파킨슨병 예방에 좋다”고 권장하는 그는 매주 4회 1㎞ 수영과 산보로 단련돼 81세의 고령이 무색할 정도로 젊고 활기찼다.

 - 한국인들에게는 전각 예술이 아직 좀 낯설다.

 “서예·국화(國畵)와 더불어 전각은 중국의 전통 지식 예술이다. 약 2000년 전인 전국(戰國)시대 때 군대에서 말을 식별하기 위해 찍은 낙인에서 유래했다. 권력을 상징하는 옥새(玉璽), 관리들의 신분을 증명하는 관인(官印)으로 사용됐다. 명나라 때 문붕(文鵬)이란 인물이 처음 자기가 쓴 글을 직접 돌에 새겼다.”

 - 71세부터 배웠다던데.

 “어릴 때 집 근처에 도장가게가 있어 호기심에 글자를 돌에 새기고 놀았다. 공직에 있을 때는 취미생활을 할 시간이 없었다. 2003년 은퇴하면서 공인의 임무를 내려놨다.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자기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돼 전각과 서예의 세계에 몰입했다.”

 - 한국 전시에 앞서 세종대왕·아리랑·한강·한라산 등을 전각으로 만들었다.

 “전각으로 한국적 요소를 표현해 봤다. 한국인들이 존중하는 인물과 문화는 세계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고 공헌했기 때문에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3개월간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도 전각과 서예작품 전시회를 했다. 당시 셰익스피어·뉴턴·다윈 등 영국이 배출한 12명의 위인 이름을 전각으로 만들어 호평을 받았다.

 - 즐겨 쓰는 서체는.

 “전통적인 지식인 가문이라 어릴 때 서양식 학교에 다니면서도 방학 때는 서숙에서 서예를 배웠다. 위진(魏晉)시대의 예서(?書)체는 느린데 동진(東晉)시대의 ‘서성(書聖)’ 왕희지의 행서(行書)체는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龍飛鳳舞)’ 속도감이 있어 제일 좋아한다.”

 - 가장 높게 평가하는 문인은.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李白)이다. 두보(杜甫)는 정치 색채가 있었지만 이백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재(文才)였다. 안사의 난(755∼763)에 가담했지만 신선으로 추앙받았기에 황제도 감히 이백을 죽이지 못했다. 여류 문인 중에서 송사(宋詞)의 대가인 이청조(李淸照)의 작품이 아름답다.”

 - 한국은 서예,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라고 부르는데 3국을 비교한다면.

 “기본적으로 한자를 쓴다는 점에서는 같다. 일본인이 쓴 작품은 당나라 안진경 서체의 흔적이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한국은 여문구·이영근·송화경 등 서예가의 작품을 봤는데 서체가 다양하게 발전했다. 원나라 조맹부(趙孟<982B>) 서체를 한국분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작품을 본 적이 있는데 글씨를 잘 썼더라.”

 -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체가 주는 느낌은.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를 많이 닮았다. 장중함과 격조가 결합돼 있다. 부드러움보다는 기개가 있다. 글씨가 개인 성격과도 관계가 있는데 그분은 성격이 강해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글씨를 가르치던 사진을 봤다. 아마 박 대통령도 서예를 좋아할 것 같다.”

 - 서울 전시회를 기념해 친필 서예 작품을 박 대통령에게 선물한다면 어떤 글귀를 쓰겠나.

 “좋은 생각이다. ‘中韓兩國人民世代友好(중한양국인민세대우호)’가 좋겠다. 세대를 넘어 양국 우호는 두 나라 국민의 바람이자 양국 정치인들이 함께 책임지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 전 상무위원은 이 서예작품을 김장수 대통령 국가안보실장과의 한·중 첫 고위급 전략대화를 위해 17일 방한하는 양제츠(楊潔<7BEA>) 국무위원(부총리급) 편에 박 대통령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 2008년에 출간한 책 『포위돌파(突圍)』에서 개혁·개방 초기의 어려움을 생생히 그렸다.

 “중국 역사의 대전환점이었던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아 직접 경험했거나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나는 개혁·개방의 시작부터 줄곧 참여했다. 그 과정은 마치 목숨을 걸고 포위망을 돌파하는 전투와 같았다. 한 걸음 전진하면 또 다른 적군이 나타나 다시 포위망을 뚫어야 하는 형국이었다. 앞으로도 중국은 개혁·개방을 중단하거나 뒷걸음질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 개혁은 학문하는 과정과도 닮은 듯하다.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처럼 전진하지 않으면 퇴보하는(逆水行舟 不進則退) 것이 개혁이다.”

 - 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후 가장 힘들 때와 어려운 점은.

 “만사는 시작이 어렵다는 중국말처럼 초기가 가장 어려웠다. 문 닫고 살던 나라를 개방하려다 보니 사상의 장벽 문제가 가장 컸다. 사실 개혁·개방은 자기 자신을 바꾸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을 바꿀 수 있나. 문화대혁명(1966∼76)의 오류를 부정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개혁·개방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를 놓고 ‘성자성사(姓資姓社) 논쟁’도 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말과 지시를 절대 바꿀 수 없다며 ‘양개범시(兩個凡是)’를 주장하는 사인방(四人幇)에 맞서 ‘진리 표준 논쟁’도 벌였다. 심각한 사상의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 그런 과정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나왔나.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92년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처음 제기하기 전에 나를 비롯해 11명의 장관급 간부들이 중앙당교(黨校)에서 경제체제 문제를 놓고 토론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와 시중쉰(習仲勳)만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찬성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에겐 경험이 없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돌다리를 두드려보면서 물을 건넌다’는 말이 나왔다. 물을 건널 때 조심하지 않으면 빠져 죽을 위험이 있다.”

 리 전 상무위원이 언급한 시중쉰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부친이다. 문혁 이전인 62년에 숙청됐다 18년 만에 복권돼 부총리를 지낸 개혁파 정치인이다. 그가 경제특구 개념을 처음 제안해 덩샤오핑이 적극 추진했다.

 - 시진핑 주석 주도로 9일부터 18기3중전회가 열린다(※18기3중전회는 12일 폐막).

 “개혁·개방은 이제 (두드려볼 돌다리도 없는) ‘수심이 깊은 물(深水區)’ 같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모든 일은 양날의 검 같아서 경제 성장이 빠른 만큼 많은 문제도 생겼다. (시진핑을 비롯한) 현 지도부는 멀리 보는 안목이 있고 계속 앞으로 전진할 용기가 있다. 이번 개혁이 성공하면 중국은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다.”

 - 덩샤오핑을 위해 전각 작품을 만든 이유는.

 “개혁·개방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인물이다. 당이 그에게 많은 임명직을 주었지만 국민이 그에게 붙여준 애칭이 ‘개혁·개방의 설계사’이고, 그가 스스로에게 붙인 직명이 ‘과학기술교육부장’이었다. 개혁·개방을 결단하고 과학기술교육을 강조한 그의 유지를 전각에 새겼다.”

 - 한국 문화를 체험한 적이 있나.

 “나는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데 한국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5)씨의 열렬한 팬이다. 최근 베이징 연주회장에는 못 갔지만 그의 전집을 소장하고 있다.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그리그·멘델스존·바르토크의 곡들이 참 아름답다. 클래식은 지혜와 창조능력을 키워준다. 나는 중국이 한국의 클래식 음악 발전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은퇴 이후 생활은.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운다(活到老 學到老)는 것이 좌우명이다. 책을 동반자로, 음악을 벗으로 산다. 두뇌 활동을 돕기 위해 가끔 브리지게임을 한다. (4명이 2대2로 편을 갈라 하는데) 나와 장쩌민 전 주석이 같은 팀이다. 우리가 이기는 경우가 많다.”

베이징=장세정 기자

동영상 설명

(리란칭 전 정치국 상무위원 중국어 발언 내용)
먼저 한국 친구분들께 안부인사 드립니다.
11월에 서울에서 저 개인의 서예와 전각 예술 작품 전시회를 합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고 한국의 친구들이 중국 문화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이번 전시회를 통해 한국 친구들로부터 배울 수 있고 한국 문화를 한걸음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두 나라 국민들의 우호, 교류, 특히 영적 교감, 문화교류 면에서 좋은 영향을 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대이자 희망입니다. 그런 효과를 달성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번 전시회 참관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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