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외교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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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닉슨 미 대통령은 9일 연두 외교교서를 의회에 보냈다. 새로운 「평화구조의 대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방대한 교서는 미·중공·일본 관계 및 미·소·유럽 관계에다가 압도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교서는 제1장에서 미국의 새 외교정책의 이념, 제2장에서 중공, 제3장에서 일본, 제4장에서 동아시아, 제5장에서 안보·원조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소 양극 체제하의 국제권력정치구조가 무너지고 5강 지배하의 세계로 이행하고 있는 오늘의 국제정세는 분명히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과도기를 지나는데 있어서 미국은 현상유지의 선에서 되도록 격동을 피하면서 국제관계를 개선하고 국제권력정치구조 다원화 경향에 알맞는 새 세계질서를 수립코자 노력해왔었는데 이런 방향은 이번 발표된 외교교서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은 대통령선거의 해에는 외교정책의 전환을 억제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 전통은 상기 현상유지노선과도 결부되어 올해 외교교서에서 아무런 참신한 맛을 감득치 못하게 하고있는 듯 하다.
교서는 동아시아 편에 있어서 장차 아시아의 안정이 미·소·일·중공 등 4강의 역할여하에 크게 달려있다고 지적하고, 이런 새 양상을 받아들이려는 미국의 자세가 ①옛 적대세력들과의 긴장완화 및 대화를 계속 촉구하며 ②옛 우방들에 대한 기존공약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양면의 정책기조 위에서는 것이라 했다. 닉슨 대통령은 『미·중공 대화는 국가적 평등과 상호존경의 새로운 기초 위에서 시작되는 새 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지적하면서도 『어느 한 나라가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블록을 혼자서 대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언명은 미·중공간 흥정이 양국 관계개선이나 양국간에 가로놓여있는 국제문제 해결에다 초점을 두겠지만, 결코 맹방의 이익을 희생치 않겠다는 처지를 재확인한 것이다.
이 교서는 한국이 관련된 제목에서 『미군감축을 가능케 했던 한국의 10%이상 경제성장률과 한국군의 강화』를 가리켜 『눈부신 성장』이라고 극구 칭찬하고, 『한국의 주도적 제창으로 가족 찾기 남·북 회담이 열린 것은 한반도에서 긴장이 완화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징조』라고 말했다.
닉슨 대통령이 남·북한 적십자회담에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데서 특히 주목된다. 이 회담이 닉슨 대통령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희망적인 징조가 될 수 있을는지 아직은 확실치 않으나 한반도에서는 긴장이 상존하고 있을뿐더러 오히려 가강되어 가는 느낌마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미국 정부의 각별한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교서는 『미국은 계속 태평양세력으로 남는다. …우방과의 공약을 희생으로 새로운 장래를 건설하는 일은 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닉슨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일본·대만·비율빈 및 한국과의 쌍무안보조약은 이 지역안보의 시금석이며, ANZUS나 SEATO 등 다변 조약도 평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서 미국은 이 공약들을 준수해 나간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미국이 아시아로부터 군사력을 후퇴시키되, 아시아-태평양의 안보에 대해서는 계속 책임을 부담하겠다는 것으로 이들 지역국가들의 안보상 사기를 고무시키는 것이다. 교서는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역할확대가 미국 역할의 대용이거나 방해물일 수 없다』고 지적, 일본의 아시아 진출을 격려했다. 일본의 아시아 진출 격려와 미국 세력의 아시아후퇴 사이에는 어떤 관계를 실정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로서는 이해 난이다.
교서는 소련의 핵미사일 증강에 우려를 표명하고, 만일 소련이 자제치 않는다면 새로운 군비경쟁을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소 평화공존을 기조로 하는 세계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최근 미·소간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경쟁이 미·소 평화공존을 깨뜨릴 정도로 과열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것이 새로운 군확 경쟁을 유발할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닉슨의 경고는 시의에 알맞는 조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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