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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유인(油印)박사 덩샤오핑

중앙일보

입력

과거 미국의 하바드 대학에서는 중국연구라면 존 페어뱅크(1907-1991) 교수, 일본연구라면 에드윈 라이샤워(1910-1990) 교수로 양분되어 있었다. 지금은 에즈라 보겔(1930- ) 교수가 일본과 중국에 대한 연구를 독점하고 있는 것 같다. 보겔 교수는 1979년 “일등국가 일본(Japan as No.1)”이라는 책으로 미국에서 일본연구의 붐을 일으켰고, 2011년에는 “덩샤오핑과 중국의 변환 (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라는 책으로 중국 붐을 일으키고 있다.

보겔 교수의 책은 금년 초 “덩샤오핑 시대(鄧小平時代)”라는 제목으로 중국어 번역본이 발간되어 65만부나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보겔 교수는 그의 책에서 “공산당이 없었다면 신중국은 없을 것(沒有 共産黨 沒有 新中國)”이라는 노래 말을 패러디하여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덩샤오핑의 프랑스 유학이 없었다면 오늘의 덩샤오핑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덩샤오핑이 프랑스 유학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만나게 되고 그의 인생에서 대전환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1904년 8월 쓰촨성(四川省) 광안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소지주인 아버지의 교육열로 불과 15세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세계 1차 대전 후 노동력이 부족한 프랑스 정부가 만든 공부하면서 일하는 프로그램(勤工儉學 work-study)이 중국의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조건은 까다로웠다. 우선 떠나기 전 6개월 이상 기초 프랑스어를 자비로 공부해야 했고 중국의 출신지부터 프랑스 마르세유 항구까지 배 삯도 부담해야 했다.

자녀를 보내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생각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덩의 아버지는 금전보다 유학 보내기에는 너무 어린 아들이 걱정되었다. 그는 아들의 유학을 위해 자신의 동생을 동행시킬 정도로 열성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덩의 유학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세계대전 직후의 불경기로 당초 약속과는 달리 프랑스에 온 중국 젊은이들에게는 일자리가 없었다. 덩은 철광공장 직공, 레스토랑 웨이타 등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하고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배움이라는 꿈을 이루고 있었다. 유학을 떠날 때 아버지에게 약속한 “서양의 지식을 얻어 후진국 중국을 구하겠다”라는 당찬 약속을 잊지 않았다.

1922년 18세인 덩은 저우언라이의 권유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입당하면서 “샤오핑(小平)”으로 개명한다. “드물게 빼어난 사람”이 되라고 아버지가 지어 준 “시센(希賢)”이라는 이름은 마음에만 새기고 중국을 위한 “작은 병(小甁)”이 되겠다는 겸손에서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발족한지 1년 후였다.

그는 파리에서 당 기관지 “붉은 태양(赤光)”를 밤낮 없이 등사판(謄寫版)으로 찍어 내어 한 때 “유인(油印)박사”는 별명까지 얻었다.
1925년 덩은 불과 21세 나이에 중국 공산당 유럽지부의 간부가 되면서 프랑스 경찰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1926년 저우언라이의 주선으로 덩은 프랑스를 떠나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덩샤오핑이 중국 공산당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것은 다음 해였다. 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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