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와 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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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외국유학 몇달만에 우리말을 잊었다는 유학생이 있다.「프랑스」유학 1년만에 돌아온 어떤 화가가「파리」에서의 습관이 몸에 배어, 술을 따를 때마다 병 끝을 비트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이런 것은 모두 악의 없는 허세라고 보아도 좋겠으나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우리주위에는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는 고질적인 정신병이 유행되고 있다.「파커」가 아니면 만년필이 아니고「라이카」가 아니면 사진기가 아니고「롤렉스」가 아니면 시계가 아니다. 일류교에의 향수병 역시 마찬가지다.
몇년전 미국에서의 일이다. 미국 농촌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도시에서 떨어진 한 농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다지 부유한 농가는 아니었으나「트랙터」하나와 「트럭」두대, 자가용차 두대를 가지고 있었고, 넒은 농장에 산재해있는 마소만 해도 10여 마리는 넘을 것 같았다.
가족 소개가 끝난 후 칠면조고기를 대접받고 농장구경을 할 때였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이집의 둘째딸 S양이 기념촬영을 하겠다고「카메라」를 들고 달려나왔다.
그러나 이 집에 하나밖에 없다는 그「카메라」는 거리계도 없는 3불짜리 싸구려였다. 나는 무심코 내 팔에 늘어진「렌즈」1.8의 일제「카메라」를 보자, 왜 그런지 낯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내「카메라」는「라이카」도 아니거니와「니콘」도 아니었다. 보통 흔히 쓰는「카메라」였는데도 어째선지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S양이 내「카메라」가 참 좋아 보인다고 칭찬을 하면서 자기「카메라」도 싸구려이긴 하지만 사진만은 잘 찍힌다고 눈웃음을 치며 말했을 때 나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었다.
그후 나는 미국내의 관광지를 여행할 때마다 남이 든「카메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의 모두가 값싸고 실용적인「카메라」를 들고 있을 뿐「라이카」같은 고급품을 든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허세란 무지의 산물이다. 허세는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기 위한 비굴한 수단에 불과하다.
내적인「실」이 빈약하면 할수록 외적인「허」는 반비례적으로 조장되게 마련이다. 미국내의 외국공관「파티」중에서도 소련대사관이 베푸는 혁명기념일「파티」가 가장성대하고 가장 호화롭다고 한다.
미국의 흑인들이 최신형 고급 차를 몰고 다니는 것도 자신의「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어리석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주제에「엔사이클로피디어」사전을 사다놓고 흐뭇해하는 벼락부자들, 머리를 기르고 혀 꼬부라진 노래를 부름으로써 유행의 첨단을 걷고 있다고 자부하는 여장남인의 젊은이들,「골프」를 쳐야 정치를 한다고 믿는 위정자들, 모두가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 환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병은 어떤 외적인 강압이나 제재에 의해서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꾸게 한다 고해서 농가소득이 증대되는 것도 아니고「히피」형의 머리를 가위로 자른다 고해서「히피」정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길을 닦고 「빌딩」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내적인 치유가 아쉽다.【김학수<한국외대교수·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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