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제25화>카페시절|이서구(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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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유술집의 내역>카페가 세월을 만나 재미를 보게되니, 남촌은 명치정을 중심으로 무수한 유사업체가 문을 열고 북촌은 종로·인사동·무교동에서 제각기 손님을 불러대 장안천지는 카페라는 신규 술집이 판을 치게되었다. 카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고급요정에 대한 대중술집으로는 내외주점과 목로술집이 있었다. 내외주점은 간판을 내걸지 않고 여염집에서 은근히 술손을 맞아들이는 앉아서 마시는 술집이었다. 이런 술집을 내외주점이라 부른 내력은 술장사는 여자가 하지만 술손님과는 만나지 않고 여자 하인이 나서서 서비스를 하는 까닭에 안주인이 내외를 한다는 뜻에서였다. 내외란 말은 그때에도 흔히 쓰이던 우리말이니 남녀유별의 철칙에 따라 내간 여자는 외간 남자와 만나지를 않는다는 뜻이다.
내외주점의 특색은 얼굴은 내놓지 않지만 음식솜씨가 좋아서 안주가 먹음직하고 슬 담그는 법도 조상 때부터 일러오는 비방 같은 것이, 있어서 술맛이 좋았다.
게다가 인심이 순후해서 마치 자기 집 사랑손님 같이 정성어린 접대 때문에 호평이 자자했던가 보다. 분 냄새 피우는 아가씨 같은 것은 숫제 외면을 하려는 순 주객에게는 다시없는 존재이기도 했다.·여기서 재미있는 일은 안주도 술청도 없이, 오직 술만 파는 집도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졸가리만 남은 가난한 선비의 아낙이나 노모가 가난한 살림에나 보태려고 넌지시 파는 술집이니 이 역시 술맛이 좋아서 병을 들고 술을 사러오는 이웃이 단골이 돼있다.
우리 나라는 자고로 농본국이라서 위로는 상감마마를 비롯하여 아래로는 광충교 다리 밑 움 속에 사는 걸인에 이르기까지 한갓 바라는 것은 곡식이 잘되는 것뿐이라서 만일에 흉년이 들면 국왕은 전국에 금주령을 내린다. 술을 마시는 자보다는 담가서 파는 자에게 혹독했다.
그래서 서울 남산기슭 가난한 선비들의 아낙들은 글밖에 모르는 남편을 대신하여 살림을 꾸려 가자니 그 고초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갓 희망은 남편이 대과급제하여 벼락출세하는 것뿐.
가난살이에 쪼들리는 아낙들은 곧잘 술 담가서 이웃에 잘기도 했다. 가짜와 거짓을 모르고 사는 시절이어서 술맛은 언제나 똑같고 항상 진국이다. 만일에 흉년이 들어 왕이 금주령을 내리면 서리를 맞는 것이 병술집이다. 병을 들고 가서 술을 산다해서 병술집이라는 속칭도 생겼지만 이 병술 집과 금주령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 많다. 모두가 가난한 선비가 병술을 파는 어진 아내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다는 내력이요, 금주령에 걸려서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 나라 술집의 꼬투리를 캔다면 먼저가 병술집 그 다음이 내외술집, 또 그 다음이 요릿집, 현대화된 것이 카페일 것이다.
여기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술집이 있으니 그것은 카페와도 비슷한 선술집이다.
선술집은 목로술집과 같은 뜻의 호칭이겠지만 문자그대로 서서 마신다 해서 선술집인 것이다. 선술집에는 술을 떠서 주는 주모가 앉아서 술 한 사발 단위로 판다. 술안주는 꼭 한잔에 한가지씩이다.
술은 두 잔을 마시고 안주는 삼 인분을 먹으면 반드시 눈살을 찌푸리고 나중에 가서는 넌지시 귀띔을 한다.
『손님, 다음 번 마시는 술안주는 먼지 잡수셨습니다.』
은근한 한마디는 사뭇 구수하다.
『이 도둑놈아, 술안주는 왜 덧거리 질을 하느냐.』
요사이 인심 같으면 당장 욕설도 나을 법 하지만 50년 전만 해도 살맛이 있었다.
뒷골목 은근한 선술집쯤 되면 카페 못지 않은 아가씨도 있었다. 손님이 서서 마시는 판이니 아가씨 역시 서서 지낸다. 술손이 들끓는 사이를 누비며 술잔도 들어주고 술안주도 구워서 준다. 게다가 흥이 나면 권주가 한마디쯤 읊어주니 술 한잔에 10전하던 때였으니 1원만 가지면 아가씨의 권주가에 유흥기분을 만끽한다.
세월이 날로 새로와 져서 목로집, 선술집은 이제 거의 자취를 찾기 어렵지만, 카페시대가 온 것은 마치 선술집이 현대화한 것 같아서 아버지는 선술집에 가고, 아들은 카페로 가고, 할아버지는 내외술집으로 가던 시대가 바로 새바람에 옷깃을 날리고 마음마저 경박해가던 그때 그 시절, 이제는 까마득한 옛일 같아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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