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제자는 필자>|<제25화>「카페」시절(2)-10원짜리의 위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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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카페」가 제일 먼저 간판을 건 곳은 일본인의 거주 중심지가 되는 남촌이었으니 지금의 명동이다. 국립극장 맞은편 모퉁이에 있었는데 당시의 안목으로는 대단히 크게 보였다. 여급도 수십명씩 들끓고 해만 기울면 성시를 이루었다. 이름은 「마루비루」 이것은 일어와 영어를 모아서 지은 이름이니 당시의 소위 「모던·보이」의 귀에는 멋지게 들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북촌에도 「카페」가 등장했는데 지금의 종로2가 남쪽, 목조 2층집이었다. 이름은 낙원회관이라 했다.
그러니까 「마루비루」는 일본인상대요, 낙원회관은 한국인의 놀이터로 알려졌지만, 일본인들은 모두 직장을 가지고 알뜰하게 지내는 형편이라서 어디를 가나, 여기서만은 한국 젊은이들이 판을 쳤으니 실은 서글픈 일이었다.
여급의 국적 역시 일본 여자가 흔치 않아서 대부분 한국 딸들의 등장을 보게되니 일본말은 몰라도 「카페」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유리했다.
그러면 당시의 「카페」손님은 누구 누구였던가. 돈 한푼 못 벌건만 부유한 집에 태어난 덕택에 밤마다 술과 계집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부유층의 아들밖에 없었다.
그들은 「카페」를 하나의 사교장으로 치는 게 아니라 미희를 노리는 유흥장으로 착각했다. 이런 의미에서는 「카페」는 요릿집과 방불하고 여급은 기생이나 다름없게 되고 말았다.
더우기 색다른 일은 여기서만은 비록 「죠센징」이라도 10원짜리 지폐 몇장만 보이면 허리를 굽히고 아양을 떨었다. 10원하면 지금은 「버스」값도 안되지만 그때 돈 10원이면 구두가 1컬례에 「와이셔츠」까지 살수 있었으며 1등 기생의 최고 「놀음차」(팁)도 10원이면 만족하였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짐작이 간다.
10원 한장을 내면 쌀을 두세 가마씩 내 주던 때 일이니 거의 신화에 가깝다.
낙원회관에서는, 모두 일본 이름을 쓰게 마련이니 춘자·화자·영자·순자 등 가지각색 이름이 등장하고. 본명은 깊이 간직해 두었다가 좋은 손님에게나 넌지시 귀띔하는 버릇이 지금이나 일반이었다.
여기서 우선 생각나는 것이 박문양이라는 호걸남아 이다. 이 사람은 다음날 서울의 팔난봉중의 한사람으로 화류계의 거성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잠은 기생집에서 자고, 세수는 이발소에 가서 하고, 식사는 요릿집에서 하는 멋쟁이였다. 자고 새면 기생과 요릿집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가 어쩌다가 낙원카페에 발을 들여놨다. 『야! 이거 참 놀기 좋은 데로구나.』 한창 흥이 나서 요릿집은 비켜 놓고 「카페」로 발길을 돌리니 같이 놀던 친구들이 투덜거린다.
『이 사람아, 점잖지 못하게 「카페」에는 왜 자꾸 가나.』 비난, 공격이 빗발치듯 하니 박문양은 대답대신 그들을 끌고 낙원「카페」로 들어섰다. 문 앞에 도달하자마자 아우성소리, 『이랏사이마세.』 이것은 우리말로 『어서 오시라』는 환성이다.
수십 명의 미희가 줄지어 늘어서서 반가이 맞는 재미는 보느니 처음이다. 본시 우리나라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예의지국이라서 그런지, 여자가 너무 나다니면 싫어하는 풍습이 있어서 요릿집 기생들은 의젓하기가 대갓댁 아가씨 같건만, 여기서는 손님만 들어서면 때를 지어 『이랏샤이마세.』 대 합창이 울려나니 어깨가 으쓱해지고 신바람이 나게 마련이다.
자리를 잡으면 어느 틈에 1대1의 상대가 늘어앉아서 10년 그리던 애인같이 따르니, 이야말로 낙원이다. 이래서 초저넉에는 술값도 싸고 「서비스」가 좋은 「카페」에 가서 우선 한잔 마시고 밤이나 이슥해서 요릿집으로 발길을 옮기는 새로운 풍습이 생겼다.
박문양은 낙원회관에서 「넘버·원」으로 꼽히는 일본여급을 노린다고 소문이 나 돌았으나 그 여인은 결국 건달보다는 착실한 사나이를 골랐으니 그가 바로 장안 신문기자 중에서 중진으로 대접받던 H씨였다.
H기자는 당시 대판매일신문 경성특파원으로 그 위력은 자못 대단했다. H기자는 경상도 사나이로 신수도 잘났지만 인품이 의젓하고 구수한 맛에 매력이 만점-. 가는 곳마다 「로맨스」를 남겼지만 낙원회관에서 만난 일본인 여급은 끝까지 H기자를 받들어 그야말로 어진 아내가 되었으니 H기자는 술만 취하면 반드시 『야-이년아. 너는 왜년야. 겉으로는 좋은척 하지만 속으로는 「죠센징」이라고 깔보구 비웃지!』 고함을 치면 그녀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용서해 주기를 빌었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을 방불케 했다.
『이 사람아, 욕하는 것도 지나치는데 어저께는 때렸다며…』 『일본격언에 계집은 사흘만 안 때리면 여우가 된다구 했거던. 일녀는 일본식으로 다스려야 하는 거야.』
H기자는 의젓하게 웃었다. 아마 한국인으로서 일본여자를 의젓하게 거느린 사나이로서는 가장 유명했으며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유명한 연예인이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계속> 【이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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