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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제24화 발명학회(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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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과학조선』발간
거물급 유지들의 후원을 받고 재출발한 발명학회는 회원이 2백여명에 이르렀다. 학회는 기회를 확대하여 다방면의 사업을 전개했다.
전무 김용관씨와 상무 김희명씨를 주축으로 그 밑에 경리부 출판부 법리부 영업부 광무부의 5개 부를 두었다. 기구는 일견 거창해 보이지만, 김용관씨가 거의 혼자서 일을 보았고 김희명씨가 도왔다. 출판부는 과학잡지를 발간하는 한편 각종 도서를 출판사와 제휴하여 우편 판매했다. 무엇보다도 기쁜 일은 발명학회가 한국최초의 과학잡지 『과학조선』을 발간한 일이다. 편집 겸 발행인은 이승학씨, 그러나 김용관 전무가 원고의 3분의2룰 썼고 편집에서부터 인쇄에 이르기까지 온갖 정열을 쏟았다.
드디어 창간호가 나온 것은 바로 재출범한 달인 33년6월15일 얄팍하나마 아주 값진 책이 나왔다. 초판은 나오자마자 매진되어 재판을 찍었다.
조선역사상 위대한 발명을 소개함으로써 거의 직접적으로 조선민족사상을 찬양했고 조선인의 두뇌의 우수성을 강조, 은근히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첫「페이지」권두언이 그랬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대서특필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을 통쾌히 부수었음을 암시했다. 진주성에서는 정평구가 비차를 제작케 했고, 장손은 비격진천뇌를 창제하여 세계 박격포의 효시라 기술했다.
변이갑의 화차는 「탱크」의 할아버지이며 이태종 때 주활자는 서양보다 50여년 앞섰고, 세종의 측우기는 서양보다 2세기 앞섰음을 알려 이를 보는 사람마다 조선민족의 긍지를 느끼고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조선인 발명을 소개하고 발명의 지도문의에 대한 해답을 싣는 한편 미신타파를 강조했다. 그밖에 수많은 과학지식·과학계소식·해외과학을 소개했는데 당시 일인들의 과학잡지인 『과학지식』『어린이과학』『과학화보』를 재료로 썼다.
법무부는 바로 내가 근무하던 부서다. 이사장 이인씨의 변리사자격을 빌어 조선발명가들의 특허출원사무를 보았다. 가난한 사람에겐 무료로 해주고 돈 있는 사람에게는 수수료를 받았다. 이듬해인 34년부터는 출원건수가 늘어나 김전무와 김상무 둘의 손만으로는 모자라 나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수수료는 발명학회의 주요 수입원이 됐다. 몇 해 후는 한해에 1백여건이 넘었다.
감옥의 죄수들이 발명했다고 출원해와 공주형무소·원산형무소·해주형무소·대구 등에 출장 가서 일일이 구술을 받아 서류를 작성하고 도면 등 발명품의 모양도 형무소 면회실에서 일일이 말을 들어 그리자니 고충이 많았다.
불완전한 미완성품이 많았으나 개중에는 완전히 마무리된 발명품이 있었다.
종로경찰서에 근무했던 김모형사는 미결수로 4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그는 헌 신문지를 압착해서 구두창을 만드는 고안을 했다. 소위 대용피혁의 일종이다. 이미 타인이 특허를 해놓은 것이었으나 물자가 귀하던 때라 대용품이라면 일인들이 회를 쳤고, 죄인에게 용기를 줄 겸 달리 특허 낼 방도를 궁리했다.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처음 취급했던 특허가운데 기억이 생생한 것은 원주서 시계포를 경영하던 김완식씨의 축음기 자동음반교환장치다. 당시 유성기는 음반이 SP였으므로 한 면에 한 곡 넣은 것이 고작이었다. 한 곡 틀고는 바로 뒤집어야 했는데 이 뒤집는 일을 자동으로 처리하는 장치다.
약 3년 걸려서 만들었다는데 실제 시작품을 들고 우리사무실에 찾아왔다. 꽤 희한한 것이었다. 김씨는 시계포를 경영했던 탓인지 수백 개의 시계부속을 이리 저리 맞춘 것이다.
그래서 요즘 생각하면 생략할 수 있었던 부분도 재료 탓으로 우회했던 것 같다. 도면이 80장, 설명서가 1백장이 넘었다. 결국 동경지허국에서 특허가 나왔다. 그후에 수「페이지」에 달하는 설명서를 빠뜨린 것이 발견되어 왜놈들도 별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필경 분량이 하도 많아 대충 뼈대만 읽어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도 됐던 것이 당시 일제들도 공업육성에 힘들었으므로 웬만한 발명은 모두 장려했었다.
일본특허국은 특허출원 중 공상이고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대개 거부통지를 해왔는데 이것은 10건 중 1건뿐이고 9건이 등록됐다. 요즘 같으면 미비서류는 가차없이 반려됐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정정통지서·보충통지서란 것을 보냈는데 깨알같은 글씨로 새까맣게 수정하고 친절히 방법까지 적어보냈다. 나는 이것을 받아 그대로 정서만해서 보내면 1백% 특허가 나왔다.
이런 것을 통해서 특허출원사무를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이들은 발명을 길러나간 것이다. 우리 나라가 이들처럼 발명을 길렀다면 지금쯤 대성한 사람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영업부는 등산기구·해수욕복·운동기구 같은 물건을 맡고 광고물을 얻어다가 학회 운영비를 충당하려 했으나 여의치가 못했다.
광무부는 광산개설에 따르는 업무를 대행해 주었으나 일이 활발치 못했고, 나중에는 정모란 이로부터 사기까지 당할 뻔했다. 그는 금광의 노다지가 발견되었으니 학회에서 갈망하는 실험실을 만들 기금을 희사하겠다고 했다. 이인씨와 김용관씨가 현장에까지 가보니 감정서를 위조한 것이 들통났다. 그는 희사금을 핑계 대고 학회로부터 채광비를 보조받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결국 학회는 특허출원수수료만 가지고 근근 살림을 꾸려나갔다. <계속>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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