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6)고 유석창 박사의 뜻 기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상허 유석창 박사는 풍운이 거센 이조말엽 애국지사의 슬하에서 자라나, 청운의 뜻을 의학에 두고 인술을 통하여 민족운동에 정성을 바쳐오다가 조국이 광복된 후로 깨달은바 있어 이 나라의 교육계에 몸을 바치게 되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었을 때 사재를 털어 현재의 낙원동 교사를 마련하여 정치학관을 창설하였다. 그 후로 정치대학관·정치대학을 거쳐 건국대학교의 오늘에 이르렀고, 그동안 총장으로서, 재단이사장으로서의 대임을 완수하였다. 유 박사는 수천의 교직원과 수만의 문하생들이 진실로 숭앙 경모하는 품격을 갖춘 사표이었다. 언제나 관대하고 온화한 후덕으로 그들을 선도하였다. 그의 사생활은 참으로 절약하여 검소하였고 공익을 위하여 철저하게 봉사하였다. 기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재화를 중시하였으나 그것은 사욕에서가 아니라 공익재단을 육성하는 일이었다. 그런 중에도 사교의 친밀감은 두터웠건만 권세에 아부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유 박사는 평생의 행로에서 폭넓은 시야와 투철한 식견을 갖추고 국가사회의 풍성한 발전을 기하여 모든 정성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일찌기 민중병원을 이끌고 대중의 보건에 기여한바 컸었거니와, 또한 이 나라 지역사회의 개발을 추진하였고, 전국농업기술자협회를 창설하여 영도하였다. 이는 조국의 근대화에 선봉이 되는 성인교육의 일환이었다. 상허 선생은 잠시도 쉴 새가 없이 근무에 정진하였다. 또한 세심하게 휘하의 인력을 독려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어언간 심신의 과로로 몸이 쇠약하게 되었다. 원래 의사이니 만큼 평소 자활요양에 유념하였으나 고희의 고령으로 여전히 활동을 계속하였으니 몸이 더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료에 갖은 힘을 기울였으나 「인명은 재천」이라 어찌하리오! 1972년을 맞이한 원단의 새벽에 드디어 운명하였으니 슬픈 마음을 금할 도리가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