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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동이 경일에게 주는 새해 엄마의 동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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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일이와 경애,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할아버지네 집에를 갑니다.
경일이는 푹신푹신한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차장 밖을 신나게 내다보고 있습니다. 커다란 버스가 뒤로 휙휙 물러갑니다. 택시도 물러갑니다. 좀 멀리 보이는 커다란 사층집 오층집도 뒤로 슬슬 물러갑니다. 더군다나 앞에 있는 나무나 걸어가는 사람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경일이가 탄 택시를 못 따라오고 뒤로 휙획획휙 떨어져 나갑니다.
『어디 따라와 봐. 씨이 우리 차를 따라와?』
차창으로 더 바싹 다가앉습니다.
『경일아, 왜 추운데 그렇게 창에 붙어 있니? 경일아, 너 할아버지 댁에 가면 세배 잘 해야한다. 경애하고 같이. 오늘 할아버지 댁엔 손님들이 많이 오실텐데」
『엄마, 난 절 잘할 줄 아는데 경일인 어떡해? 아까 아빠한데처럼 그냥 막 엎드려도 괜찮아? 그렇게 해두 되는거야?』
누나 경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 참견을 합니다.
『그럼! 남자는 그렇게 해두 괜찮지머. 경일인 아직 어리니까.』
『그렇지, 참. 경일인 아직두 유치원에두 안들어갔는데 뭐!』
『뭐라구? 왜 나두 이제 아빠가 석달만 있으면 유치원 다닐거랬어. 절만 잘하면 단가 뭐? 나두 그까짓 세뱃절 잘 할 수 있어. 그렇지만 난 안할거야. 씨이,』
경일이는 입을 삐죽 하며 다시 창쪽으로 돌아 앉읍니다.
『쉬잇.』
엄마는 얼른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시며 경일이 몰래 경애에게 눈짓을 하십니다.
차는 어느새 고가도로 위를 달립니다. 사람들은 저 아래로 조그맣게 보입니다. 차들도 저 아래로 조그맣게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경일이는 언젠가 아빠하고 창경원에 가서 비행기를 탈 때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아빠하고 단둘이 갔었읍니다.
경일이는 코끼리가 창살 밖으로 그 길고 쭈글쭈글한 코를 팔뚝처럼 휘휘 저으며 과자를 집어먹던 생각이 납니다. 백곰이 두 앞발을 멋있게 저으며 춤을 추던 모습, 원숭이가 그네를 타던 일, 원숭이가 거울을 들여다보던 일이 생각납니다.
―야아, 신난다―
경일이는 갑자기 엄마쪽을 돌아다봅니다.
『엄마! 오늘 할아버지네 가지 말고 창경원에 가, 응.』
『아니, 넌 이렇게 추운날 별안간에 창경원은 웬 창경원이냐? 오늘은 설이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큰엄마께 세배하러 가야되는 거야. 창경원은 벚꽃이 활짝 피는 따뜻한 봄에나 가야지.』
『엄마는? 춥긴 뭐이 춰. 난 창경원이 더 좋단 말야, 참.』
『그래두 오늘은 안돼. 어른들께 세배 드려야 하는 거니까. 알았지, 경일아.』
갑자기 엄숙해지시는 엄마의 얼굴에 경일이는 하는 수 없이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몸을 푹 묻어버립니다.
어느새 다 왔는지 앞에 앉으신 아빠의 지시대로 지익 소리를 내며 택시가 멈춰 섭니다.
할아버지네 댓돌 위에는 하얀 고무신들, 새까맣게 윤이 나는 남자구두들이 나란히나란히 놓여 있읍니다. 방안에서는 어른들 목소리가 떠들썩합니다.
『할머니이!』
어느새 경애가 큰소리 칩니다. 방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먼저 나오십니다.
『아이유, 경애 오는구나. 저런 경일이두, 어서들 들어오너라, 춥다』
경일이 손을 잡고 앞으로 들어가십니다.
『오오냐. 아따 고것 절두 참 잘한다. 그렇게 입혀 놓으니까 제법 색시태가 나는구나.』
할아버지에게 누나 경애가 얼른 먼저 세배를 한 것입니다. 경일이는 큰일이 났다고 생각합니다. 가슴이 철렁 떨어지는 것 같읍니다.
―그렇게 막 엎드려두 흉안봐?―하고 조금 전에 경애가 택시를 타고 올 때 엄마한테 하던 말이 커다랗게 귓전을 울려옵니다.
『어디, 우리 경일이두 세배 좀 해봐라. 어 참 잘 생겼다. 어서 좀 해 봐라.』
할머니가 말씀을 하시자 큰 고모님, 삼촌들이 모두 경일이 절할 자리를 비켜 주십니다. 경일이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 앞이 별안간에 큰 운동장처럼 한없이한없이 넓어집니다.
『어디 그래, 우리 경일이 절 좀 받자. 오옳지 어흠.』
큰기침을 하시며 할아버지가 자리를 고쳐 앉으십니다. 경일이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절을 하려고 두 손을 잡습니다. 그런데,
『그래, 경일이도 어서 세배를 드려봐라. 누나처럼!』
큰 고모가 잇달아 또 한마디 하십니다. 경일이는 큰 고모의 말에 갑자기 다시 주눅들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이때 다시 또 온 방안이 웅성웅성합니다. 누나 경애가 납죽납죽 절을 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큰고모·큰아버지, 이렇게 차례로 뱅뱅 돌면서 세배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유, 조런 깜찍도 해라. 어쩌믄 그렇게 절을 잘 하니.』
온통 경애칭찬이 야단들입니다.
이때 주춤주춤 경일이가 할아버지 앞으로 나갑니다. 넙죽 엎드려 절을 합니다. 할머니 앞, 큰아버지, 큰고모, 차례차례로 넙죽넙죽 절을 합니다. 일제히 온방 사람들이 경일이를 보십니다. 웅성웅성하다 일제히 웃음이 터집니다. 대견한 듯이 한바탕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껄껄 웃으십니다. 큰고모도 아빠도 껄껄걸 웃으십니다.
경일이는 냅다 뛰어들어 엄마에게로 안깁니다. 모두들 절을 잘못해서 흉을 보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자 울먹울먹 해집니다.
그러나 경일이를 꽉 끌어안았던 엄마의 팔이 풀리며 엄마가 경일이 얼굴을 홱 돌려 여럿이 있는데로 내놓습니다.
『어어 참 장하다. 우리 경일이 참 세배 자알 한다.』
연거푸 빠작빠작하는 세뱃돈 백원짜리가 막 쏟아져 나옵니다. 누나에게도 경일이에게도 막 쏟아져 나옵니다. 경애와 경일이 주머니 속이 뿌듯해집니다.
할아버지네 댁 건넌방은 아이들 방입니다. 고모님네 선희, 경일이, 경애, 큰엄마네 경란이, 이렇게 모두 우르르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그 중에 제일 키가 큰 경란이가 누가 제일 많은가 세뱃돈 세어보기를 제안합니다. 경란이 것이 8백원, 선희가 7백원, 경애가 5백원, 경일이가 4백원이었읍니다.
이때 경애가 경일이 귀에다 입을 대고 소근소근합니다. 끄떡끄떡 경일이가 아래위로 고개를 크게 끄덕입니다.
제일 큰 경란이와 제일 꼬마인 경일이가 편을 먹고 선희와 경애가 또 한쪽편이 됩니다.
윷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개만 해, 개만 해. 그래야 잡는단 말야.』
경일이 등을 두들기며 경란이가 소리칩니다.
『아냐. 도야도. 도가 어림없다. 우리말을 잡아?』
선희와 경애도 지지 않고 소리칩니다.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마음을 졸입니다. 경일이가 던진 윷가락이 따르락 때구르르 방바닥에 굴러 떨어집니다.
『야아, 개다 개! 그러면 그렇지, 잡았다아.』
경일이네 편이 좋아서 펄떡 뜁니다.
딩―동―뎅―딩―동―댕―
소리가 납니다. 초인종 소리가 딩동댕 납니다.
경일이가 맨 먼저 마루로 뛰어 나갑니다. 경애도 뒤따라 뛰어 나갑니다. 보나마나 오신 손님은 큰 고모부이십니다. 경일이가 이번에는 쓱 앞으로 나갑니다.
서로 인사를 하며 고모부가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넙죽 엎드려 절을 합니다. 온방안 사람들이 으하하핫 하고 웃습니다. 백원짜리 한장이 또 나옵니다. 경일이는 세뱃돈을 받기가 무섭게 뛰어 나옵니다.
『누나야, 나두 다섯장야. 너하구 꼭 같다.』
펄떡펄떡 뛰면서 싱글벙글 합니다.
『모 해라 모! 모만 하면 이 말도 잡고, 그리구 걸하나만 치면 이 말도 또 잡구‥.』
경란이와 경일이, 선희와 경애가 윷놀이를 다시 합니다.
『옛다. 이것들 먹어라』어느새 할머니가 초컬리트와 귤 사과 과자 그런 것을 듬뿍 쟁반에 담아다 주십니다.
『그래 그래, 그러자.』
경애와 선희의 의논대로 이기는 편은 초컬리트 50원짜리 한개씩, 지는 편은 사과 한 개씩 윷놀이 상을 타기로 모두가 작정합니다.
경애가 이번에는 모를 해야 할 차례입니다. 따르락 떼구르르 윷가락이 구릅니다.
『야아― 야아-.』
경애와 선희가 펄떡 펄떡 뜁니다. 정말 모를 한 것입니다. 윷 한가락이 때구르르 때구르르 굴러가다가 폭 엎어지는 바람에 도가 될뻔하다가 정말 모가 된 것입니다.
딩-동-댕- 딩-동-댕-
초인종 소리가 또 들립니다.
그러나 경일이와 경애, 선희와 경란이는 이제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도 들은 체도 안합니다.
또르락 또르락 윷가락 구르는 소리가 납니다. [이희성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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