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의 권력구조 변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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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3개월 동안 공식석상에 일절 얼굴을 나타내지 않아 갖가지 억측을 자아내게 했던 중공국방상 임표의 숙청이 확인되었다. 중공이 그 맹방의 정부 및 당대표에게 보낸 공한에서 임표는 중공지도층에서 이미 제거되었음을 정식으로 통고했다는 사실이 지난 11월30일「하노이」에서 밝혀진 것이다.
다른 한편, 같은 날짜의 중국공산당기관지 『인민일보』, 당이론지 『홍기』, 중공군기관지 『해방군보』가 공동 제재한 주요정책사설은 중공의 일부 고위지도자들이 모종의 「음모사건」에 관련되어 있음을 시인하면서 이 음모자들의 일부가 『외국과 은밀한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중공문제 전문가들은 이 논설이 국방상 임표와 기타 군 지도자들을 지적해서 직접적으로 통렬한 공격을 가한 것으로 보고있다.
임표는 60년대 후반기 중공을 휩쓴 소위 「문화대혁명」에서 탈권투쟁을 전개, 유소기 등 실권파를 거세시키고, 모택동의 지위와 권위를 강화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이로 말미암아 69년4월의 전당대회를 통해서 중공의 권력서열 제2인자인 동시에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거물급지도자이다.
문화혁명을 수습, 정리하고 당과 정부를 재조직함에 있어 군의 개입과 지배는 절대적이었는데 그 군의 정점에는 항상 임표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처럼 방대한 실권을 장악했던 임표와 그를 추종하던 고위군사지도자들이 숙청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아마도 모·주의 지배체제강화를 반대키 위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망타진된 것이 아닌가고 짐작된다.
지난날의 문화대혁명과정에서 당시의 국가 부주석 유소기가 「수정주의지」·「우파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완전히 거세됐던 일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새로운 바가 있다.
그런데 이 「반수정주의·반 우파」투쟁을 벌이는데 있어 임표는 늘 좌파의 선두에 섰기 때문에 「극좌파」로 불러왔다. 그러므로 임표 일파의 숙청은 모·주 등이 극좌의 모험주의노선을 실력으로 제압해 버리고 중도노선을 옹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중공의 접근은 71년의 국제정세를 특징짓는 대 사건인데, 중공으로서는 대미접근·화해부터 먼저 시도할 것이냐, 혹은 대소접근·화해부터 먼저 시도할 것이냐에 관해 당 최고위지도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논쟁에서 임표 일파는 대미접근노선을 완강히 반대했다고 하는데, 결국 대미접근노선이 승리하게 되니 그 일파는 몰락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임일파의 숙청은 모·주 등이 당내잡음을 일소하고, 대미협상태세를 갖추는데 중요한 계기를 이룬 것이라 풀이된다.
또 한가지, 임일파의 숙청과 관련해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중공에서는 이를 계기로 군에 대한 당의 지배가 또다시 회복되고 확립되지 않았겠느냐 하는 관측이다. 문화혁명수습과정에서부터 당과 군의 관계는 역전되어 당이 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군이 당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군이 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기한 중공기관지들의 공동사설이 시사하는 것은 임일파에 대한 숙청으로 이런 경향에 종지부를 찍어 공산정권 본래의 자세대로 당이 군을 지배하는 상황으로 되돌아갈 공산이 크다는 사실과 아울러서, 또 그러기 위해 앞으로 광범위한 숙청작업이 계속 되리라는 것을 유력히 말해주는 것이다.
정책전환의 필요가 있을 때마다 「넘버·무·맨」(제2인자)에게 모든 잘못의 책임을 뒤 집어 씌우고 다룬 세력과 제휴하여 이를 깨끗이 숙청해버리는 모택동의 권모술수는 대단히 놀라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중공정권은 바로 이 까닭으로 해서 당내서열이 굳어지지 않고 늘 불안·동요상태에 놓이게 되고 만성적인 정치불안이 지속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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