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원은 「제도의 허」를 노렸다-「주택은 자금횡령」을 통해본 문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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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부 여자행원들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최근 잇단 시중은행의 여행원 공금횡령사건은 대부분 창구업무를 맡은 여행원들이 은행예금제도의 헛점을 이용해서 저질러졌다는데서 은행의 공신력마저 떨어뜨리고 있다. 여행원들의 손으로 저질러진 은행부정 사건은 최근 들어서만도 부천군 농협 부평지소 직원 윤희숙양(21)의 예금 4천만원 횡령사건(10월26일), 제일은행 원주지점 적금계원 손영자 여인(36)의 적금8백50만원 횡령사건(11월6일), 그리고 지난1일 드러난 주택은행 소공지점 예금담당 김상남양(24)의 예금3천만원 횡령도주사건 등 큼직큼직한 부정이 연거푸 일어났다.
최근에 두드러진 여행원들에 의한 부정사건은 여느 때보다도 그 규모가 커지고 지속적인데다가 업무의 성격상 고도로 지능적이고 전문적인 수법을 대담하게 활용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특히 이번 주은 소공지점 김상남양의 경우, 은행측이 업무개선을 위해 새로 도입한 「유니트·시스팀」이 (Unit System)의 헛점을 노렸다는 점에서 은행창구업무에 새로운 문젯점을 던져주고 있다.
주은 소공동지점 김양의 경우, 건축업자인 형부 김선웅씨(30)가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에 짓고 있는 주택건축비를 내주기 위해 약3개월 전부터 예금된 돈을 전표를 없애버리고 은행에 넣지 않은 채 빼돌려 왔다는 것 경찰조사에 따르면 김양은 보통예금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면서 예를 들어 1천만 원의 예금을 맡게되면 예금주의 통장에는 액면 그대로, 원장에는 2백만 원으로 각각 기입, 전표를 없애 버린 뒤 나머지 8백만 원을 평소 주택은행과 거래가 있는 형부 김씨의 구좌에 넣어두었다가 김씨로 하여금 인출해 가도록한 것이다.
경찰은 이런 방법으로 김양이 형부 김씨와 치밀한 계획아래 행방을 감추기 하루 전쯤 그날 들어온 예금을 단 한번에 김씨의 구좌에 넣었다가 빼내갔을 것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창구의 일개 예금담당여직원이 마음대로 계수를 조작, 이같이 엄청난 돈을 감쪽같이 빼넣수 있었다는 것은 김양이 이른바 「유니트·시스팀」에 따라 출납업무전표취급 장부기장 등을 혼자서 취급하기 때문에 간부직원들의 감독이 소홀한 여건에서는 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예금주가 예금을 인출해갈 때도 김양이 현금출납까지 겸해왔기 때문에 주위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입금된 다른 사람의 돈을 내줄 수가 있었다.
「유니트·시스팀」은 업무내용별로 출납에서 기장에 이르기까지 한사람에게 맡겨 업무를 간소화하고 그 대신 담당직원의 책임을 강화시킨 것.
이제 도는 수시로 통장과 원장을 대조해보는 등 감독기관이나 간부직원들의 철저한 감시가 뒤따르면 지극히 효율적이라고 한다. 소공지점의 경우 3개월 동안 김양의 계속적인 공금횡령을 적발치 못하고 있다가 본점의 자체감사를 앞두고 탄로날것을 눈치챈 김양이 행방을 감춘 뒤에야 횡령사실을 적발한 점으로 보아 감독 소홀의 책임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알려졌다.
예금기장과 현금출납을 겸하게 한데서 빚어진 불상사는 농협부평지소여직원 윤희숙양(21 인천시 북구 부평동385)의 예금횡령사건에서도 마찬가지. 윤양의 경우, 그의 약혼자 정모씨(28)가 발행했던 액면 20만원 짜리 수표가 은행으로 들어왔으나 정씨의 예금잔고가 없어 부도가 날 판이었다. 윤양은 때마침 이모씨가 예금하러 가지고 간 26만5천 원을 이씨의 통장에만 입금된 것으로 정리해주고 원장에는 기재하지 않은 채 그 돈을 가공인물인 「정기원」이름으로 예입시켰다가 다시 빼내 약혼자의 부도를 막아줬다.
이 방법으로 시작한 범행이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대담해져 액수가 큰 예금에까지 손을 댔던 것이다. 윤양은 원장의 예금계수를 조작, 빼돌린 예금은 무려15개의 가공인물명의로 된 통장에 분산예치, 약혼자에게 넘겨주곤 했다한다. 이같은 사실은 타자원이 자리를 비운사이 윤양이 입금표의 예금계수를 몰래 찍다가 출납대리에게 발각됨으로써 드러났었다.
제일은행원주지점 적금계 여행원 손영자 여인의 적금횡령사건도 마찬가지로 원장의 계수조작에 의한 것이다.
손씨는 원주시중앙동 김낙천씨(45)등 2명의 경우 20만원 짜리 정기적금을 넣고있는데 원장에는 몇달 동안 불입을 써넣지 않았고 서모씨(30)등 3명의 경우 50만원 짜리 적금을 넣고있었으나 은행에는 원장이 전혀 없었다. 하루 적금하러 가는 고객50여명가운데 2, 3건은 이같은 방법으로 불입금액이 그녀의 「핸드백」속으로 들어갔다.
이같은 은행의 부정사건은 금전만능의 풍조를 타고 언제나 돈과 가까이 있는 은행원들 사이에 번번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부정을 감독하는 은행감독원은 사고의 내용이나 건수를 일체 숨겨오고 있다. 이 때문에 노출되는 부정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진다. 때때로 탄로가 난다해도 은행의 체면이나 공신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 자체 안에서 쉬쉬하며 얼버무리기 예사.
이번 주은 소공지점의 경우만 해도 김양이 공금을 빼낸 뒤 달아났다는 사실을 은행측은 3일이 지나도록 경찰에 신고조차 않고 있다가 1일 하오 뒤늦게 첩보를 받은 남대문 경찰서 형사반이 현장에 출동했을 때도 은행측은 끝내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제일은행 원주지점 사건 때도 은행측은 『은행돈이 축난 것은 한푼도 없다』고 발뺌을 했고, 농협 부평지소 사건 때도 사고예금주가 예금을 인출하러 가면 현금을 내어 줘 가며 15일 동안이나 사실을 숨겨왔었다.
이처럼 부정사건이 있을 때마다 철저한 감독이나 제도보완 등으로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기 앞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금융가의 폐습이 오히려 부정을 만성화하고 대형화시키는 요인이 되어 왔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금창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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