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맥아더」원수 해임>(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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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노병>(2)
1951년 3월 24일에「맥아더」성명이 발표되고 이어 4월 5일에「조세프 마틴」의정이 하원에서 원수 서신내용을 낭독한 그 이튿날인 4월 6일에「트루먼」대통령은「애치슨」국무 「마셜」국방「브래들리」합참본부의장 「해리먼」특사를 불러 회의를 열었다.「트루먼」은 이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맥아더」서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던 바 모두가 이제 행정부가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특히「해리먼」특사는「맥아더」가 2년 전에 해임됐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리먼」은 그때 원수의 일본점령미군정책에 불만을 품고 시정책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애치슨」국무장관은「맥아더」를 마땅히 해임해야 하지만 일을 신중히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합참본부의장「오머·브래들리」원수는 이 문제는 군기로 다루어야 하며,「맥아더」가 명령에 불가한 이상 당연히 해임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조지·C·마셜」국방장관은 처음에는 원수에 대한 제재를 꺼리며 의회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다루도록 건의했다. 이러자「트루먼」은「마셜」국방에게 그 동안 동경과「워싱턴」사이를 오고간 문서철을 다시 읽어보라고 권했다.「마셜」은 4월 7일에『문서철을 자세히 훑어보니,「맥아더」는 오래 전에 파면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육군장관 통해 통고하러>
4월 8일에는 합참본부의 육·해·공 참모총장들도 원수 해임에 동의했다. 「트루먼」은 이렇게 모든 관계자들의 동의를 얻은 다음에야 자기는 3월 24일자의「맥아더」성명이 발표됐을 때 그에 대한 해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주=본 연재 257회 참조). 이로써「맥아더」원수의 해임은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트루먼」대통령은 애초에 이 해임통고를 그때 한국전선을 시찰중인 육군장관「프랭크 페이스」를 통해「맥아더」에게 전달하려고 했다.「애치슨」장관은「페이스」장관이 즉시 동경에 가서 이를 직접 원수에게 통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이 전문을 주한「무초」대사에게 띄웠다.
그러나 일이 꼬이느라고「페이스」장관에게는 곧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는 미 제8군 전선 근방에 나가「리지웨이」장군이 보는 가운데 야포를 쏘고 있었다. 이때까지 생긴 근대 전쟁의 관례의 하나는 저한명 인사가 전선에 나타나면 저당한 포병부대에 데리고 가서 한방 쏘게 하고 멋진 사진도 찍으며 직접 전투하는 기분도 맛보게 하는 것이었다.「트루먼」이「맥아더」의 일체 관직을 박탈했을 때「페이스」장관은 한국전선에서 이「관례」를 따르느라고 연락이 안 닿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임통고를 육군장관보다 하급 자에게 넘겨주어 전달케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으면「페이스」장관과 연락이 될 거라고「워싱턴」은 생각했다.
「트루먼」은 또한「존·포스터·덜레스」에게 동경에 가서 일본점령군 사령관의 경질이 일본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길전 정부에 알리라고 지시했다.
「덜레스」가 막 동경으로 향발하려고 할 때에 합참본부의장「브래들리」원수가 몹시 흥분해서 대통령에게로 달려왔다.「브래들리」는 인사 기밀이 누설돼서「시카고」의 한 신문이 11일 조간에 「맥아더」해임기사를 보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국의 대통령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의 중대발표를 신문이 앞질러 보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트루먼」은 이제「페이스」장관에 연락이 닿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게 외었다고 단정했다.「맥아더」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시간에 자기 해임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졸던 기자들 선잠 번쩍>
이문제로 나중에「트루먼」은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여하튼「트루먼」공보비서는 4월 11일 상오 1시(워싱턴 시간)에 처음에는 투덜대며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일단의 기자들에게 대통령 발표문을 나누어주었다. 발표문에는 기자들의 졸리 움을 금방 확 깨게 하는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몹시 유감스럽지만 본인은「더글러스·맥아더」원수가 미 행정부 및「유엔」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따라서 본인은「맥아더」원수를 그의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매듀·B·리지웨이」중장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입헌제도 하에서는 국가정책을 활발히 토론한다는 것은 극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군사령관은 그에게 주어진 방침과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문제이다. 위기에 처해서는 특히 그와 같은 고려가 요구된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으로서의「맥아더」장군의 역사상 위치는 완전히 확립되었다. 온 국민은 그가 수행한 특출한 봉사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본인은 이번에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재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맥아더」원수 자신은 이런 돌연한 해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맥아더」회고록 (The Reminiscences of Douglas MacArthur) 을 보면, 원수는 해임「뉴스」자체는 극히 담담한 심정으로 받아들였지만 일언반구의 해명기회도 주지 않은 그런 기준적인 인사방법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난을 가하고 있다.
나의 해임명령은 4월 11일 하오(동경 시간)에「라디오」방송을 통하여 동경에 전해졌다.「라디오」는 정규방송「프로」를 중단하고「트루먼」대통령은 지금 막「맥아더」원수를 극동과 한국에 있어서의 사령관 지위와 일본점령미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는「워싱턴」으로부터의 특별발표를 보도했다.

<맥아더 원수 전선 시찰 준비> 나는 점심을 끝내고 한국전선을 시찰하러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의 부관인「시드니·하프」대령이「라디오·뉴스」를 듣고 내 아내에게 전화로 내가 해임되었다는 것과, 그 발표는 해임 이유에 관해서 내가 행정부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언급은 없었다고 알려 주었다. 아내는 괴로운 표정으로「하프」대령의 말을 전해주었지만 나는 담담한 심경이었다. 나는『「제니」(부인의 애칭), 이제 어쨌든 집으로 돌아가게 됐어』라고 말했다. 그것은 정말 긴 여행이었다.「필리핀」에서 군사고문으로 근무하려고「워싱턴」을 떠난 지 15년만에 처음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한 군사령관이 나의 경우처럼 비상수단으로 해임된 예는 미국 사상 없었다.
청문도 없었고,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았었고, 과거 경력에 대한 고려도 없었다.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해임되는 순간까지 공적으로 내 사령부에 와있던 대통령 연락장교를 통하여 칭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해임될 때에는 내 입장을 설명한다든가, 비난이나 반대에 대해 해명을 한다든가, 또는 나의 장래 구상과 계획을 말한다든가 하는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 내가 받은 해임명령은 너무도 졸지인데다가 그 명령내용이 가혹했기 때문에 보통 사령관 교대 때에 있는 상례적인 의견교환도 나눌 수 없었다. 사실상 나는 위협 하에 놓여 있었다. 사무실의 사동이나, 청소부나 하인이라도 당연히 받아야 할 격식이나 예우를 짓밟히며 이같이 무자비하게 해고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
한편「맥아더」후임에 임명된「매듀·B·리지웨이」장군은 대통령의 해임결정을 이해, 지지하면서도 그런「즉석 해고」방법은 피했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리지웨이」는 그의 저서「한국전쟁」(The Korean War) 에서 이 문제와「맥아더」로부터 사령관직을 인계 받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트루먼」과「맥아더」의 논쟁이 모두 애국적인 동기에서 시발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둘의 견해차이는 원수가 귀국한 후 7주에 걸친 상원청문회의에서 비로소 분명히 밝혀졌다. 처음에 그렇게 격렬했던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이 청문회가 있은 후에는 많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군사령관을 사전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신문발령」을 통해 해임하는 그런 방식은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의젓한 모습에 감명 받아>
원수 해임 후 내가 그를 만난 것은 4월 12일이었다. 원수의 후임이 된 나로서는 이 대면이 결코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거북하고 미안한 생각이 간절했는데 아무 원한이나 분노가 없는 잔잔한 원수 표정을 보고 새삼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원수 태도는 종전과 다름없이 의젓하고 침착했다. 확실히 그의 꿋꿋한 투지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4월 16일 원수가 동경을 떠날 때 그를 비행장에서 전송했다. 원수는 내 손을 잡으며 잔잔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요다음에 당신이 동경을 떠날 때에는 미 육군 참모총장이 되어 본국에 돌아오기를 바라오. 만약 내가 스스로 내 후임을 추천할 수 있었다면 틀림없이 당신을 점찍었을 것이오.』결코 입치레가 아니고 진심으로 우러나온 원수의 이 말은 나에게는 가장 가슴 벅찬 작별선물 이었다. 4개월 전에 내가 미8군사령관으로 취임하러 갈 때도 원수는『8군은 당신 것이요. 소신껏 지휘하시오』라고 신임을 표시했던 것이다 (주=본 연재238회 참조).
비행장에서의 전송이 생전에 있었던 원수와 나와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주요일지(1951년 4월5, 6, 7일)
※4월5일 ▲미군, 동해안에서 38선 북방 15마일까지 진출 ▲거창 사건 국회조사단 피습 ▲한강철교 복구공사 완료 ▲미, 원자간첩인「로젠버그」부처에 사형언도
※4월6일 ▲38선 이남의 적 전부 적출 ▲학도의용군과 정훈공작대 해산 ▲재산가들의 장병위문금 총액 5천 9백원 ▲10만 중공증원군 전선에 도착
※4월7일 ▲외무장관에 변영태씨 임명 ▲AP의 세계 여론조사, 소련 참전가능성 농후로 집계
※알림=12월1일(수)부터「거창 사건」을 다룰 예정이오니, 관계자료나 사진을 가진 분은 중앙일보 집국『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연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화(28)8211(교환)의74번. 야간과 일일은(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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