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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벨트」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부자가 나귀 한 마리를 타고 나그네길을 떠났다. 물론 아버지만이 나귀를 타고 아들은 그 옆에서 걸어갔다.
이를 본 사람들은 어린 자식만 걷게 하고 자기만 편히 간다고 아버지를 흉보았다.
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들을 나귀에 태우고 자기는 걸었다. 얼마동안이 지나자 이번에는 아비를 걷게 하고 자기가 탄 아들을 불효자식이라 흉보는 소리가 들렸다. 하는 수 없이 부자는 둘 다 걷기로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나귀가 있는데도 타지 않는다니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흉이 들려왔다.
그도 그럴듯하다 하여 부자가 같이 나귀에 올라탔다. 한 명도 힘에 겨워 보이는 나귀 위에 둘이나 올라타다니 나귀가 딱하지도 않느냐는 욕이 곧 그들의 귀에 들렸다.
굳이 「이솝」의 얘기가 아니라도 이런 얘기는 너무나도 우리주변에 흔하다.
무미일을 정해 놓았다가 다시 없앴다가 또 새로 마련하는가하더니, 이번에는 잡곡은 팔아도 좋다고 했다한다. 누가 뭐라고 하면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 사람의 말이 그럴싸하면 안들을 수 없는 것이 빤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린·벨트」만 해도 그렇다. 당초에 그게 설정되었을 때는 누구나 장한 일이라 여겼다. 눈사람모양으로 날로 「매머드」화 해 가는 서울의 숨통을 터주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땅 장수들이 먼저 들고일어났다. 아니 들고일어났다고 한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그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실정되기 전에 이미 개간 허가를 받고 땅은 제외한다고 했다.
그래도 또 못마땅하다해서 땅임자들이 손을 썼다. 아니, 손을 썼다는 얘기다. 아무도 그들이 손을 어떻게 썼는지는 알 턱이 없으니 그저 뜬소문으로만 들릴 수밖에 없다.
들고일어난 사람, 손을 쓴 사람, 모두 그럴싸한 명분은 있었나보다. 그러잖고서야 그들의 말을 따를 턱이 없는 게 분명했다.
사람이 살 곳도 모자라는 판에 녹지대라는 사치가 무슨 소용이냐고 누가 또 말한다면 안들어 줄 이도 없다. 또 이렇게 얘기가 끝나야 제격에 맞게 된다.
「이솝」의 나귀도 결국 부자를 다 태우다 기진하여 쓰러졌다. 녹지대인들 편할 덕이 없을 것이다.
이미 서울 시내에서만도 지난 2년 동안에 90만평이나 녹지대가 줄어들었다. 서울 밖의 「그린·벨트」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미처 눈을 돌릴 사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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