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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맥아더」원수 해임(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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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유럽」제일주의(2)
「트루먼」대통령이 11월30일에 행한 『원자탄성명』의 불발로 「맥아더」의 확전안 실현은 영 가망 없게 됐지만 그래도 노병은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2월29일에 「맥아더」는 합참본부에 중국본토해안의 봉쇄와 만주기지의 폭격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미군은 한반도로부터 아예 철수해야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든지 그렇지 못할 바에는 아주 물러나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합참본부는 대통령과 면밀히 상의한 후 『한국을 계속 방위하고 중공군에 계속출혈을 강요해야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만 철수하라』는 회답을 보냈다.

<나토강화주력·확전 안바라>
이 회답을 보고 격분한 「맥아더」는 즉시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그는 한국에서 버티면서 동시에 일본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만약 국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한국에서 현상유지를 바란다면, 합참본부와 대통령은 거기서 생기는 중대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따졌다. 이에 대해 「트루먼」대통령은 1951년1월13일에 장문의 「메시지」를 「맥아더」에게 보냈는데 요지는 미국이 남한을 계속 방어하면서 「유럽」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미국이 단독으로 중공과 전면전쟁에 돌입한다면, 아직도 움돋는 단계인 「유럽」의 집단안전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유럽」제일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6·25전의 현상으로 사태해결을 촉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맥아더」는 「트루먼」행정부와 「유엔」에서 고립무원상태였지만 미국의회 안에서는 원군을 찾을 수 있었다. 상·하원의 공화당우파가 바로 반군이었다. 「맥아더」와 이 공화당 우파 의원간에는 정치 및 사상적인 배경이나 대공 투쟁관에 있어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다가 행정부 공격에 있어 「타이밍」이 좋았다. 「아시아」에서는 중공이 한국전에 개입하고 「유럽」에서는 서독 재 군비와 「나토」군 창설이 구체화한 1950년11월부터 미국의회에서는 수개월동안 외교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토의가 계속됐다. 여기서 「트루먼」행정부를 맹렬히 비난한게 「로버트·A·태프트」상원의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우파였으며 하원대표는 「조셉·마틴」의원이었다.
이들은 국무성 공격전략에 「애치슨」과는 앙숙인 「맥아더」의 위신을 이용하려고 했으며 「맥아더」는 한국 확전 전략실현에 「태프트」와 「마틴」일파를 이용하려고 했다. 이렇게 쌍방의 이기관계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공화당우파의 공격은 1951년2월12일에 「마틴」의원이 「뉴요크」에서 행한 연설이 「클라이맥스」였다. 그는 이 연설에서 「트루먼」행정부는 80만의 국부군이 「아시아」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일부 책임 있는 합참본부군인들도 미국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값싼 이 작전」에 찬성하고 있으며 「맥아더」도 전폭적으로 이를 지지하고있는데 유독 국무성이 반대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유럽」과 「아시아」를 다같이 동시에 구출하는 전략을 바란다면 「딘·애치슨」장관을 비롯한 현 국무성관리들을 모두 내몰아야 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3월8일에 「마틴」의원은 2월12일의 「뉴요크」연설사본을 「맥아더」에게 보내어 국부군에 의한 제2전선 형성문제에 관한 원수견해를 구하였다. 「맥아더」는 3월20일에 자기견해를 서한 형식으로 전했는데 「마틴」의원은 4월5일에 하원본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맥아더」서한 전문을 낭독했다.
『본인은 2월12일자 귀하 연설사본과 서신을 반갑게 받았습니다. 중공개입으로 조성된 사태에 관한 본인의 견해와 대처방안은 이미 자세히 「워싱턴」에 전달했습니다.

<아주 지켜야 유럽도 안전>
대체로 말해서 이 문제에 관한 나의 견해는 우리가 과거에 언제나 그렇게 해서 성공했던 것처럼 적군에 대해서는 이편에서 최대한의 병력으로 대전해야한다는 종래의 유형을 따른 것입니다. 국부군 사용문제에 관한 귀하의 견해는 논리적이며 전통적인 것이지 결코 모순된 것은 아닙니다. 이곳 「아시아」는 공산음모자들이 세계정복을 위한 활동무대로 택한 지역입니다. 외교관들이 「유럽」에서는 언어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동안에 「아시아」에서 우리들은 「유럽」의 전쟁을 무기를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한테 패하면 「유럽」도 필연적으로 잃을 것이며 「아시아」에서 승리하면 「유럽」에서 전쟁 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인사들은 놀랍게 이점을 이해하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귀하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승리 아닌 다른 대안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맥아더」의 회답내용은 「트루먼」행정부의 「아시아」개척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바로 「유럽」제일주의를 통렬히 비난한 것이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의회 안에서 민주당행정부공격에 기세를 올리고있는 공화당과 야합한 것으로 보고 이제 「주사위」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고 결심했다.
이 문제에 겹쳐 「트루먼」으로 하여금 「맥아더」해임을 최종적으로 결심케 한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한국의 현지전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12월의 비참한 총퇴각』을 치른 「유엔」군은 기적적으로 오산·제천·영월·삼척선에서 재기하여 2월부터는 반격을 개시, 전선은 다시 서서히 북상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분히 명장 「매듀·B·리지웨이」장군의 탁월한 지휘와 그가 안출한 「출혈작전」(Operation Killer)이 주력했기 때문이었다. 「리지웨이」장군은 부임도중 동경에 들러 「맥아더」로부터 미8군의 작전권에 대해 상당한 자기 재량권을 얻어놓았었다(주=본 연재 238회 참조).
이와 함께 그때 중공군이 부산까지 내려오지 못한 이유로서 그들 보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과 북경정권 역시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6·25전의 현상유지로서 한국사태의 해결을 마음에 두고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있다.
그러나 전세가 호전되자 「완전승리」아니면 「총 철수」의 집념에 사로잡힌 「맥아더」 머리 속에는 다시 중공군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계획이 짜여지기 시작했다.
원수회고록(The Reminiscences of Douglas MacArthur)에는 인천 상륙 보다도 더 규모가 큰 그 작전계획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있다.

<방사성폐기물 투하계획>

<나는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중공군을 궤멸시킬 장기계획에 착수했다.
내가 결정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는 목표는 적의 보급로였다. 우선 여러 지역에 걸쳐 도처에서 한정된 목표를 노리는 지상공격을 반복하고 서울을 다시 탈환하여 장래의 작전기점으로 삼는다. 다음은 북한전역에 대해 대규모의 폭격을 가하여 적의 배후를 쓸어버린다. 압록강을 넘어오는 적의 대 증원부대를 공격하거나 압록강다리를 파괴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을 경우에는 적의 주요보급선의 전부에 걸쳐 방사성폐기물 즉 원폭제조 때의 부산물을 투하하여 북한을 만주와 차단해 버린다.
북한은 파괴되어 있으며 보급물자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중공군이 필요한 식량과 무기는 모두 만주에서 반입해야한다.
중공군이 북한안에 비축한 식량은 10일분 정도이고 탄약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그리고 한국에 투입된 중공군은 근1백만에 달한다. 그래서 나는 허가해준다면 국부군을 사용하고 다시 미군 증원도 얻은 후, 북한의 양해안선 북단에다 상륙과 공정투하작전을 동시에 감행하여 적을 거대한 함정 속에 몰아넣을 계획이다. 그렇게되면 중공군은 굶주림에 떨며 항복할 것이다.
식량과 탄약이 없는 군대는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의 인천상륙을 보다 더 확대해서 짜낸 작전계획이다. 나의 이 전략의 제1단계는 만족스럽게 진행되어 「유엔」군은 1951년3월14일에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에 도달했다.
이 무렵에 합참본부도 드디어 내 견해에 동조해서 중공해안 봉쇄·만주상공 정찰금지해제·국부군사용과 국부군에 대한 보급지원 등을 「조지·마셜」이 국방장관에게 진언했다(주=본 연재 이번 회의 「마틴」의원「뉴요크」연설내용참조).
「리지웨이」8군사령관도 「로튼·콜린즈」육군참모총장에게 옛 친구의 호소라는 형식으로 개인 서한을 보내 미8군을 국부군사용으로 증강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 모든 진언이나 호소는 각하 되고 말았다.>
「유엔」회원국들에 단단히 발목을 잡힌 「트루먼」이나 국무·국방성으로서는 「맥아더」의 새 작전계획을 허가할 수 없었다.

<맥아더, "중대결정"시사>
이래서 「맥아더」가 적 보급로를 끊기 위해 단계적으로 요청한 압록강 수풍발전소를 비롯한 한만 국경상의 주요 군사목표 폭격은 대부분이 각하 됐다. 3월7일에 「맥아더」는 그가 보기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워싱턴」태도에 기자회견을 통해 또다시 일침을 가했다.

<현재와 같은 제한된 조건에서 「유엔」군이 지상에서 이 이상 진격한다는 것은 대 출혈을 초래할 것이며 군사적으로 적을 이롭게 할 것이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한다. 그것은 군사령관으로서 본인에게 주어진 권한범위를 훨씬 넘는 결정인 현재 한국에서 중공의 선전포고 없는 전쟁으로 빚어진 미해결문제에 끼여있는 안개에 대해 최고의 국제수준에서 해답을 주는 그런 결정이어야 한다.>
「워싱턴」은 「맥아더」가 촉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원수가 바라던 그런 결정은 아니었다. 이 결정을 둘러싸고 「트루먼」과 「맥아더」대결은 마지막 「라운드」에 들어갔다.
◆주요일지 (1951년3월30·31일, 4월1일)
※3월30일▲국군, 38이북8리 진격▲북한에서 적차량 l천8백대 이동 목격▲적전차대, 경의가도로 남하▲이대통령, 멸공대회에서 통일호소연설▲호지명군, 불군에 중압
※3월31일 ▲국군, 임진강도하▲신의주상공서 80대의 피아 「제트」기 대공중전▲국회, 거창 사건조위구성▲화란증원군, 한국 향발
※4월1일▲동해안 현리서 적 공세▲중공 제4 야전군, 3야전군과 교대▲1월 이래의 적 출혈22만▲서울피난민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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