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고깔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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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0여년 전 아들이 베를린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다. 전날 학용품을 사러 가게에 들렀더니 고깔모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남들이 사길래 따라서 하나 샀다. '입학하는 애들에게 왜 고깔모자를 씌울까?'속으로 의아해 하며 아들 머리에 적당한 걸로 골랐다.

다음날 아들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물론 머리엔 고깔모자를 씌운 채…. 그런데 좀 이상했다. 독일 애들은 모두 뭔가 잔뜩 넣은 고깔모자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옆에 있던 한 노인에게 물었다. "이건 머리에 씌우는 게 아니라 학용품이나 초콜릿 등을 넣어 입학선물로 주는 것이라오." 아뿔싸! 얼른 아들 머리의 고깔을 벗겼다.

그리고는 남이 볼 새라 고깔 속이 보이지 않도록 입구의 천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황당하면서도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고깔모자가 서양에선 열등생이나 잘못을 저지른 학생에게 씌우는 물건이었으니까.

고깔모자를 영어로는 '던스 캡(dunce cap)'이라고 한다. 이 말은 13세기 스코틀랜드의 학자 존 던스 스코투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스코투스는 고깔모자가 학생들의 수업능력을 높여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일 고깔모자는 이처럼 학생들 체벌기구로 바뀌었다.

이후 궁정의 어릿광대들이 알록달록한 고깔모자를 쓰기 시작해 이제는 광대들의 기본 소품으로 자리잡았다.

엊그제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었다. 서울 한 초등학교의 입학식 사진이 본지 인터넷 신문인 조인스닷컴에 잠깐 실린 적이 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고사리 같은 손을 한 귀여운 모습도 잠시, 어딘가 어색했다. 꼬마들이 하나같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미 한글 다 깨치고 구구단 줄줄이 외울 아이들 머리에 웬 고깔모자?

하기야 문화란 어차피 돌고 돈다. 특히 요즘처럼 국제화된 시대에 유행은 물론 풍습까지도 서로 닮아간다. 중국이 원조인 섣달 그믐날 폭죽놀이가 독일에서 더욱 요란하고, 이게 어느 새 우리에게도 퍼져 제야에 폭죽소리를 자주 듣는 게 한 예다.

여기서 외래 문화 수용의 의미와 어려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입학식의 고깔모자가 밸런타인 데이의 초콜릿처럼 상혼이 만들어낸 작품은 아닌지 모르겠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