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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과 어린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오늘의 첫 관람객이 누군지 아세요? 유치원 꼬마들이 왔어요.』
무령 왕릉유물의 특별전시가 열린 지 2주일도 더 지난 때의 일이다. 장사진을 이루며 찾아드는 관람객 속에서 우리들의 정상적인 업무는 거의 전폐상태인 채 진열실에서 살아야 했다. 안내를 맡은 직원 없이 살아오긴 했으나 이번 기간 동안만은 더없이 아쉬웠다. 너무 많은 관람객에 지쳐 즐거운 비명이 아니라 오히려 짜증에 가까운 상태였었다.
그러나 유치원의 아기들의 찾아왔다는 얘기에 나는 어쩔 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붉게 물든 나뭇잎 몇 개가 매달린 앙상한 가지 사이로 늦가을의 하늘은 유난히 파랗기만 했다.
『미안하다. 아기들아 진열장들이 너희들을 위해선 너무나 높단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안아 올려서 보여줄 수도 없단다.』
나는 파란하늘에 대고 마음으로 사과할 뿐 끝내 진열실로는 내려가지 못했다. 저 아기들은 큼직한 신발, 깜찍한 동자상들을 제대로 보고 갔을까. 나의 사념은 몇 년 전 하와이로 날아간다.
호놀룰루 미술관의 어린이 전시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미 대륙 개척시대의 생활을 재현하는 특별전시회가 열렸었다. 그 곳에는 통나무집 속의 모양이 그대로 진열되었는데 넓적한 침대에는 우리 무령왕릉 출토의 다리미 보다 세배쯤 큰 것이 놓였었다. 마침 찾아온 어린이들에게 설명을 해야했다. 이 다리미는 그 속에 숯불을 담아 침대를 덥게 한 후 차례로 몸을 눕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 중에 질문이 나왔다.
실상 상하의 나라에 사는 하와이의어린이들은 추운 게 뭔지를 모른다. 25명의 전학생 중 미 본토에서 왔다는 아이는 너댓명, 그러나 그들도 추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는 냉방이 돼 있죠! 이것이 지나치면 추워지는 거예요.』 『시원하고 좋네요. 그래도 안되면 스웨터나 하나 더 입으면 될 텔데요.』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꽁꽁 얼어요. 저 북극 지방 같이.』
『그럼, 스키를 타죠. 빅 아일랜드서 눈을 봤어요.』
이들에게 이 미술관의 박물관 교사들도 추위를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언어의 장벽이나 표현력 부족이라는 나만의 결함이 아니었다. 추위를 모르듯 배고픔도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이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아기들에게 자상한 설명도 안내도 해주지는 못할 처지에 있다. 벌써 추위와 배고픔을 극복하는 힘을 기르며 자라야 하는 그들에게 한편으론 꿈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최대의 고고학적 수확이라는 무령왕릉의 출토품은 지별 전시기간 중 연일 시민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덕수궁 입장이라는 일동의 관문이 있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 일동의 문을 통과하는 어려움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줄 안다.
발돋움을 해도 보이지 않던 아기들이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될 때쯤 그들의 동생에겐 나지막한 진열장에 친절한 박물관 교사, 고운 녹음 테이프로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탄화된 채 남아 있는 진열장 속의 등잔에 꺼지지 않을 희망의 심지를 태워본다.<이난영 (국립 박물관 유물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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