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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PEN대회 참석, 세계1주 박기원 여사 기행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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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0일 동안에 먼저 파리, 서독의 프랑크푸르트, 벨기에의 브뤼셀, 네덜란드를 거쳐 북해를 보고 다시 파리, 그리고 워싱턴, 뉴요크, 로스앤젤레스, 스턱턴,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로스앤젤레스, 도오꾜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그밖에 공항에서만 발을 디딘 나라까지 합치면 10여 개국이 도리 것 같다. 워낙 내가 매력을 느끼는 땅은 미국보다 유럽이었기 때문에 첫발을 파리에 딛게된 것은 다행이었다.
파리 현지에 오래 있던 분들의 말에 의하면 파리여자들은 10여년 전보다 더 아름다와졌다고 한다. 경제가 안정되니까 생활도 안정되었고 마음껏 원양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드골 대통령의 덕일 거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결국 한 나라의 선정은 여자의 미까지 좌우하는 구나 싶어 실감이 갔다. 우선 거리를 걸으면서 금방 느낄 수 있는 것은 젊은 여자보다도 노경에 접어든 여자들이 더 우아하고 품위 있는 멋을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주로 바지, 그것도 허리선을 내려와 히프에 흘러내릴까 말까하는 정도로 걸려 있는 것이 유행인 것 같았다. 위는 티샤쓰에 아무렇게나 걸친 바바리코트 혹은 가죽코트를 많이 입고들 있었다.
나이는 여자일수록 많은 액세서리, 짙은 화장을 한 것은 시들어 가는 자기 미에 대한 아쉬움일까? 귀걸이·팔찌·반지 그리고 짙은 립스틱.
그러나 그것이 천덕스럽거나 야해 보이지 않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교양과 분위기 탓일는지 모른다. 오후 3시쯤 티·타임이 되면 마치 파리의 자녀들은 모두 집을 비우고 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길가 카페. 낙엽이 구르는 보도 위에는 친구를 기다리는 여자들이 작은 코피 잔을 앞에 놓고 하염없이 앉아있다. 눈여겨보니까 대개의 경우 노인들인데 이들은 같은 처지의 여자친구들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표정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고 한쪽 손에는 담배가 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 노년에 접어든 여성들의 표정에서 프랑스라는 나라와 역사를 생각했다. 전쟁을 겪고 혹은 사랑하는 사람, 또는 아들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지나간 많은 세월을 생각했다. 궁핍과 가난과 모든 물자의 아쉬운 시대를 프랑스 여자들은 이겨내면서도 긍지를 지켜왔던 것 같다.
이런 느낌은 내가 파리를 보기 전에 말로만 들었던 사치와 유해의 첨단의 나라, 무언지 들떠 있고 사양길에 들어선 오만한 나라는 인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들은 통행금지가 없어도 귀가 시간을 잘 지키고 있다. 또 질서를 요란하게 내세우지 않아도 제대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나 할까. 중류 이상의 집에서는 딸아이를 10시 넘어서는 가급적 혼자 안 내보내고 나갈 경우는 귀가 시간 약속을 절대 지키게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백화점에 가면 버드나무로 만든 회초리가 굵기대로 가지런히 꽂혀 팔리고 있었다.
자녀교육에 아직도 회초리가 필요할 때는 쓸 수 있는 어느 의미에서는 보수적인 나라이다. 그리고 여기 여자들의 너무나 철저한 정치 무관심론에는 통쾌감마저 느꼈다. 그렇다고 나라를 걱정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두철미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라는 것은 남자들이 할거고, 그들의 본업이라는 관념이 뚜렷하다. 여자들이 떠들고 나와도 별게 없다는 가정들은 여자다운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그것보다 자기자신의 생활, 자기자신의 성, 또는 자기의 남자를 위해서 쓰는 시간을 즐기는 것 같다.
파리 여자들은 부지런하다. 대문 문고리까지 광을 내 닦는다. 그러면 그들이 사치하다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파리 여자들은 사치하다기 보다 멋쟁이다. 색깔의 선택, 조화, 즉 미에 대한 감각에 있어 어느 나라 여자보다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호텔의 소제부부터 귀부인까지 그들은 멋을 낼 줄 안다. 더구나 그 역사의 향취와 예술의 미가 흐르는 거리의 건물 앞에 그들이 섰을 때 그들은 저절로 곧 멋쟁이가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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