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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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이상화

국토와 함께 빼앗겼던 모국어를 되찾는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모국어의 광복을 위해 싸운 민족시인을 기리는 일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모국어의 시비(詩碑)하나 없는 나라, 여기에 생각이 먼저 부닥친 시인이 김소운이었다. 1947년 대구에 두 번째 발걸음을 한 소운은 박목월.이호우 등 시인들을 만나 이상화의 시비를 대구에 세우자는 의견을 불쑥 꺼낸다.

잡지사나 단체의 이름을 내세우지 말고 소운 혼자만의 일로 진행시키라고 후배 시인이 권고하고 모금운동을 벌이자 소운은 꼼짝없이 나서게 된다. 소운은 부산 동래 살림을 정리한 32만원, 책을 판 돈과 선불로 받은 인세 등 62만5천원을 부어넣는데도 "친일파의 누명을 벗으려는 꿍심이다""시비를 빙자로 정재(淨財)를 거두어 호유(豪遊)를 하고 다닌다"는 중상모략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상화와 함께 백조 동인이었던 박종화가 1만원 내고 김광균.마해송.김동리.서정주.유치환등과 각계에서 십시일반으로 보태 모두 7만5백원이 들어왔다.

'상화시비(尙火詩碑)'전서는 당대의 서예가 위창(葦滄)오세창이 썼고, 비문의 시 '나의 침실로'는 열한살배기 상화의 셋째 아들 태희(太熙)가 썼다. 뒷면은 소운의 글에 죽농(竹農)소동균의 글씨였다. 4 8년 3월 14일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 나라 첫 모국어 시비의 제막식에선 권태호 작곡 '나의 침실로'가 계성중학의 밴드와 신명여고생들의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소운은 52년 베네치아 국제예술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도쿄에서 이승만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해 귀국을 금지당하고 타의로 13년간 일본에서 글을 쓰며 산다. 소운은 65년 그리운 어머니의 땅으로 아주 돌아온 뒤의 첫 수필집 '물 한 그릇의 행복'을 67년 내게 넘겨주었고, 다음해 그의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자전적 에세이 '하늘끝에 살아도'또한 내 손으로 편집케 하였다.

화가 이중섭이 현해탄을 두고 일본에 있는 아내 이남덕에게 보낸 일문 편지를 그의 엽서 그림과 묶어 내가 출판할 때 번역을 소운께 부탁드렸었다. 난로도 없는 방에서 손을 비비며 겨우내 번역한 원고를 들고 찾아오셨을 때 소운은 "이것은 내가 이근배씨께 드리는 서신입니다"하며, 내 깜냥으로는 가장 비싼 원고료를 준비했는데 한사코 거절하셨다.

일역 '현대한국문학선집'5권을 내가 주간으로 있는 동화출판사가 일본 출판사와 공동출판을 하게 돼 나는 자주 소운댁을 드나들었다. 소운이 한번은 동양방송에 출연차 서울 운현궁 스튜디오에 갔다가 새내기 여자 탤런트들을 만난다. 그런데 줄 책이 없어서 주소를 받아가지고 와서 붓글씨로 이름을 쓰고 도장까지 찍어서 등기로 보낸다.그런데 한 주일이 가고 두 주일이 가도 답장 편지는 커녕 전화 한 꼭지도 없다고 내게 역정을 내신다.

"글쎄 나는 이 나이가 돼도 여자 앞에만 앉으면 그만 딱 해파리가 되고 마네요." 고희를 넘기면서도 여자 앞에선 해파리가 되시던 소운은 81년 74세로 그리운 어머님의 품, 조국의 땅에 영원히 안기셨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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