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풍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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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해외 이주 신청자의 수가 금년 들어 급격히 늘어나 작년의 5배나 된다는 서글픈 보도가 전해지고 있다.
최근 보사부 해외 이주 창구에는 하루 평균 50명씩 한달에 1천5백여명의 이주 신청자가 몰리고 있다 하는데 이는 작년 한달 평균 3백명에 비해 5배로 늘어난 숫자이다.
또 이들 해외 이주 신청자의 사회 성분도 눈에 뛸 만큼 높은 것이어서 전체의 70%가 대학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며, 그 중에는 전직 장관·국회의원을 지낸 자, 또는 해외 대학을 졸업하고 금의 환향했다가 다시 외국으로 영구 이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6일 현재 해외 이주한 자의 총계는 6만3천9백92명이라고 하는바, 미국이 4만5천3백46명,「브라질」 6천1백34명, 「파라과이」1천7백99명, 「아르헨티나」1천6백84명, 「캐나다」3천8백16명, 서독 1천82명, 「스웨덴」1천3백8명 등으로 1천명 이상이 이주한 나라만도 7개국이 넘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나라의 초기 해외 이민들이 대개 농업 노동 이민으로서 이들은 국내에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어 농노적인 대우를 무릅쓰고 해외에 이주해간데 비해, 현재의 이주자들은 대체로 국내에서도 중류 이상의 생활을 누리던 자가 보다 나은 생활, 정신적으로 불안이 없는 생활을 하기 위해 대거 해외에 빠져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서글픈 마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물론 긴 안목에서 볼 때, 누구든지 해외에 나가서 조국의 기상을 떨치고 우리 국민의 진취적인 기우를 세계에 편다는 것은 국가 장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면도 없지 않다.
다만 문제는 왜 최근 수년래 갑작스럽게 이민 아닌, 이러한 이주 「러쉬」가 일어나고 있는가. 왜 저명 인사와 「인텔리」들이 앞을 다투어 이러한 해외 이주를 희망하게 되었는가에 있다고 하겠다. 저명 인사나 「인텔리」들은 어느 면에서나 고국에서 생활하는데 가장 큰 보람을 느껴야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국에 사는 동안은 누가 뭐라 해도 저명 인사로 대우받고, 「인텔리」로서 존경을 받게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외국에서 무명인으로서의 고독한 생활을 선택한데에는 그 배후에 깊은 이유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배경에 대해서 심사 숙고하는 바가 없어서는 아니 되겠다.
별다른 큰 축재도 없는 「인텔리」들이 애써 모은 가재 도구를 몽땅 팔아 암흑의 미래에 몸을 던지려고 하는 심정의 배경에는 한마디로 조국의 현실이 너무도 암담하다는 것 말고서도 조국에 정착하고 싶은 정신적 풍토가 마련돼 있지 않다고 절망한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해외에서 키운 애국심을 가지고 모처럼 귀국한 많은 유학생차가 뜻밖에도 모국에서 허탈감과 좌절감을 겪게 됐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조국의 앞날을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이들의 해외 이주 풍조를 그대로 좌시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견해이다.
물론 해외 이주 「러쉬」를 몰고 온 또 하나의 이유는 근년 들어 늘어난 사회 불안·경제 공황·전쟁 위기 의식의 고조이다. 때로는 정부조차 지나친 위기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의 총화를 요망하고 있는 듯 하나, 이 때문에 「인텔리」층의 지성 있는 사회 참여에 큰 좌절감을 안겨준다면 그것은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이 되도록 마음을 고쳐먹고 조국에 정착할 수 있는 사회 여건을 정비하는 것은 위정자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이주자들도 일신만의 안전을 위하여 해외에 도피할 것이 아니요, 조국에서 함께 어렵게 살면서라도 조국을 「살기 좋은 내일의 낙원」으로 만드는데 밑거름이 되는 길을 택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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