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살다보니] 윌리엄 오벌린 보잉코리아 사장·암참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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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1985년 보잉헬리콥터 사업부문의 책임자로 한국에 부임하기 전 내가 근무했던 곳은 주로 동남아 지역이었다.

그곳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따뜻한 날씨, 그리고 순박한 사람들로 기억에 남는 곳이다.

솔직히 한국 부임을 앞두고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던 한국의 인상은 '회색 빛'이었다. 그러나 김포공항을 빠져 나와 도심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나의 이런 생각은 금세 깨져버렸다. 남대문의 단청이 내게 던져준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틈틈이 시간을 내 방문했던 한국의 고궁들은 한국인들의 정신적.문화적 특성에 대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주로 붉은 색과 청색이 조화를 이루는 한국의 색깔을 나는 '따뜻함과 열정'으로 해석했다.

나는 지인들에게서 종종 한국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는다. 외국인으로서, 그것도 서양인으로서 한국의 독특한 문화와 관행, 언어 장벽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생활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람들은 매우 따뜻하고 관대하며, 한번 친하게 되면 쉽게 마음을 연다. 비즈니스로 알게 된 어느 한국인 친구는 나에게서 단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열정적으로 협상을 거듭한다. 그렇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이라도 내놓을 만큼 따뜻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에 대한 인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 여러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서울 올림픽을 꼽을 수 있다.서울 올림픽 유치는 한국이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둘째, 1997년 말 외환위기 때 보여 준 한국 사람들의 단결력이다.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은행마다 장사진을 이룬 주부.학생.회사원.할아버지 등 한국의 평범한 시민들을 보았을 때의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월드컵 때 보여준 한국 사람들의 열정이다. 월드컵 전 한국에서의 축구 열기는 유럽이나 남미에 대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월드컵 개막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최초로 16강 탈락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세계인을 감동시켰던 붉은악마의 응원 물결에 깨끗이 씻겨 내려갔고 한국은 세계 4강이라는 기적을 연출했다.

나는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할 세기의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광화문의 붉은악마 응원 인파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세살배기 내 딸은 TV 중계가 있을 때마다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을 외쳐댔다.

나는 18년간 한국에 근무하면서 한국 사람들의 따뜻함과 열정이 한국의 진정한 저력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나는 어디를 가든 한국에서의 생활, 한국 사람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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