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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적으면 불안, 많아도 골치 … 외환보유액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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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외환보유액은 아직 더 쌓아야 한다. 미국이 달러를 본격적으로 거둬들이기 시작하면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모른다.”

 전직 외환당국자의 말이다. 그는 최근 미국 재무부가 환율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필요한 양보다 많다”고 불만을 제기한 데 대해 “너무 이기적”이라고 꼬집었다. “기축통화국이라고 달러를 풀었다 죄었다 하면서 주변국 경제를 혼돈에 빠뜨려 놓고는 위험에 대비해 둑을 쌓는 것까지 간섭하는 격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외화 곳간에 쌓이는 달러는 계속 늘고 있다. 5일 한국은행은 지난달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3432억3000만 달러로 전달보다 63억 달러 늘었다고 밝혔다. 넉 달 연속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한은은 “자산운용 수익에다 유로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유로화 자산을 달러로 환산한 금액이 늘어난 게 주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지난달 원화 값이 급등세를 보이자 당국이 속도 조절을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해 달러를 사들인 영향도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달 증가 폭은 한 달 단위로는 2011년 10월(75억9000만 달러) 이후 가장 크다.

 현재 외환보유액 규모에 대한 한은의 공식적인 입장은 “부족하지는 않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늘려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의 시각처럼 차고 넘치는 수준이라고 얘기하기도 어렵다는 의미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딱 잘라 판단하기 어렵다. 외환보유액의 적정성을 따질 합의된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잣대로 삼은 건 국제통화기금(IMF) 기준이다. IMF는 단기외채(만기 1년 이내 외채)와 외국인 증권 투자 잔액, 통화량, 수출액 등을 반영해 기준치의 100~150%를 적정 보유량으로 권고한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이 기준치의 130% 수준이다.

 하지만 국제결제은행(BIS)의 기준으론 권고치에 아직 못 미친다. BIS는 3개월치 수입액, 단기외채에다 외국인 증권 투자액의 3분의 1을 합한 금액을 기준으로 삼는다. 위기가 닥쳤을 때 국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들의 투자금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걸 염두에 둔 기준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8월 말 기준으로 계산한 액수는 3717억 달러다.

 그러나 한국이 가진 특수성을 감안하면 이 기준들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대외 의존성이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 게다가 북한 변수까지 상존하는 탓이다.

실제 외환보유액에 대한 시각은 상황에 따라 급변하기도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가 대표적이다. 당시에는 ‘2000억 달러 선’이 갑작스레 위기 여부를 가르는 기준선이 됐다. 결국 외환당국은 별 근거도 없는 2000억 달러 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미국과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고서야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김익주 국제금융센터 원장은 “금융위기 직전까지만 해도 외환보유액이 너무 많다는 얘기까지 나왔는데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었다”면서 “외환위기 때의 경험이 ‘낙인 효과’로 작용한 탓”이라고 말했다. 당국자들의 외환보유액에 대한 시각이 보수적인 데는 이런 ‘트라우마’도 한몫하고 있다.

 현재 상황은 당시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외환보유액은 크게 늘어난 반면 단기 외채는 줄면서 안정성이 커졌다.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 외채 비중은 2008년 말 74.5%에서 올 2분기 말 기준으로 36.6%까지 줄었다. 경상수지도 20개월째 흑자 행진을 벌이고 있다.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건 한국만이 아니다. 한은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 상위 10위권 국가 중 홍콩을 빼고는 모두 잔액이 증가했다. 하지만 외환보유액이 ‘마지막 안전판’일 뿐 위기를 방지하는 만능 수단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 국제국 고원홍 차장은 “아시아 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쟁적으로 외환보유액을 크게 늘려왔다”면서 “그럼에도 지난 5월 미국이 양적완화 축소를 시사하자 펀더멘털에 문제가 있는 일부 국가에선 자금이 급격히 빠지는 등 홍역을 치렀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외환보유액을 쌓는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다른 방식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홍준표 연구위원은 “유사시 상대국과 통화를 맞바꾸는 통화스와프는 2선의 외환보유액”이라면서 “현재 확보액이 800억 달러를 넘어서지만 중국과의 위안화 스와프 비중이 커 위기 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달러의 비중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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