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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제21화><미·소 공동위원회>(7)문제안<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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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본 회담 개막>
예비회담의 결정한 바에 따라 본 회담이 열린 것은 3월20일 하오1시였다.
46년12월28일 이후 예비회담이 열리는 동안 사회상은 극도로 혼란했으나 (이 항목은 별도로 다루겠음) 2월5일에 평양으로 돌아갔던 소련대표단은 3월18일 열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스티코프」등은 전과같이 조선「호텔」에 들고 일부 수행원은 소련영사관에 들었는데 그래도 인원이 남아 회의장소인 덕수궁에도 몇 사람 나와 있었다. 회담장소인 덕수궁 석조전은 공위를 위해 특별한 배려가 돼있었다.
국기게양대도 3개가 마련되어 가운데는 태극기, 우측에는 미국기, 왼쪽에는 소련 기가 게양되었다.
건물도 반을 똑같이 갈랐다. 계단도 반으로 갈라 오른쪽은 미군, 왼쪽은 소련군이 쓰게되어 이른바 우·좌로 분명히 선이 그어진 것이었다.
미군 측은 계단을 오를 때도 바른쪽을 걸어가 바른쪽 건물을 씻고 소련군은 계단 왼쪽으로 걸어가 왼쪽 방을 쓰는 것이었다.
아침저녁 국기를 계양하고 하강할 때의 두 나라 병사는 복장인 경례나 동작이 판이하게 달라서 좋은 구경거리였다. 미국은 걸음걸이 등 동작이 평민적이었고 소련군은 어제까지 우리를 지배한 일본군인들의 동작을 닮은 데가 많았다.
본 회담 개회식은 20일하오1시 정각에 열렸다. 개회식에는 예비회담 때와 같이 기자들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한국인 기자와 외국인 기자 7명도 들어갔다.
미군 측에서는 「하지」장군, 수석대표 「아널드」육군소장, 「랭돈」·「데이어」·「부스」대령과 고문·전문부 기술자들이 참석했고 서련 군 측에서는 「스티코프」를 비롯 「차라프킨」과 「레베테프」소장, 「발라시노프」·「카크덴케」중령 등이 참석했다.
개회식에서 「하지」장군은 『지금 국기게양대에는 3개의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우리 공위의 노력으로 태극기만이 남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연설하여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첫날회의는 하오6시5분까지 계속되었는데 주로 회의진행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사회는 양측이 각각 1주일씩 교대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1주일은 미군이 의장이 되고 또 1주일은 소련군이 의장이 되는 것이었다.
첫날회의를 마친 공위는 이튿날인 기일에 공위 공동 성명 제1호를 냈다.
『서울에서 열린 공위에서는「모스크바」3상 회의에서 결정된 제3조 제2, 3항의 조항을 성취하기 위해 회담을 개시했다. 제1차 회의는 46년3월20일 하오l시에 시작되었다. 「하지」중장과 「스티코프」중장이 개회식에서 연설했다. 이 연설은「라디오」로 중계되었다』는 것이 성명의 전문이다.
이 공위 첫 회의에는 미군 측에서 한국인으로서 이묘묵 박사가「하지」장군의 고문겸 통역자격으로 참석했고 노어통역에 고정훈씨, 영어통역에 허현씨(작고)가 참석했다.
소련군 측에서는 영어통역으로 남일이 나왔다. 휴전회담 때 북괴군대표로 나온 바로 그 남일이다. 회의진행방식, 회의순서를 싸고 난항을 거듭했는데 가장 큰 난관은 공동「코뮤니케」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용어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가령「국민」이란 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영어로는 「피플」이라 하지만 노어로는「나로드」이다. 「피플」은 「국민」으로 번역되지만 「나로드」 는 「인민」이란 뜻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용어상의 「뉘앙스」가 엇갈려 국민이란 말을 표현하는 단어는 그 당시「민족」이란말로 얼버무렸다.
「코뮤니케」의 작성이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즉 미군 측의 연설 (또는 결정문) 과 소련 측의 연설문을 놓고 한국어로 일단 번역, 양측연설의 뜻에 가장 합당한 말로「코뮤니케」를 작성, 한국어와 영어를 잘 아는 미군 측 담당관과 한국어와 노어를 잘 아는 소련군 측 담당관에게 보여 좋다는 「사인」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국민」의 경우와 같이 뜻이 다른 말이 많았던 것이다.
제1차 공위는 이같이 어려운「코뮤니케」를 여러 차례 발표하면서 회의를 진행했으나 차차 의견이 벌어져 결국 제5호 성명에서 의견의 완전대립이 나와 회담이 결렬되고 만다(차회에서 자세히 다룸) .
이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예비회담에서 결정 된데 따라서 3월15일부터는 남북간우편물교환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회담의 앞날이 암담하다는 것은「하지」와 「스티코프」의 기조연설에서 이미 비쳐지고 있다.
즉「하지」장군은 개회식에서『제일 먼저 미군의 목적은 조선에 언론·집회·신앙·출판의 자유를 수립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속시키자는 것이다』고 밝혔지만 「스티코프」는 『공위는 「모스크바」회의의 역사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며, 미·소 양국의 위대한 군대는 제국주의 일본군대를 격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영구히 제거하고 조선을 해방했다』고 하여「해방의 은인」으로 자처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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