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제자는 필자>|<제20화>전문학교(8)|김효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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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연 전과 숭실대생>
연희전문학교와 숭실 대학은 선교사들이 선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설립했던 것인 만큼 교육은 종교에 비해 2차 적인 목적밖에 되지 못했고 교육정책도 자연히 기독교적인 테두리 안에서 세워지게 되었다.
입학자격의 제한이 있었던 것은 물론 교내행사에는 반드시 종교의식이 따랐고 종교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정했다.
일요일에는 교수·학생을 막론하고 예배당의 출석을 의무화했다.
이 같은 종교교육이 학생들의 성격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게 한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학생들이 예배당에 참석하면 예배절차의 하나인 찬양대에 연 전 생과 이화여전 생들이 혼합하여 합창을 하곤 했기 때문에 남녀간의 교제도 빈번해져 성격도 정서적인 면으로 흐르게 되며 복장도 자연히 단정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연 전과 숭실대생들의 기질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신적 배경은 기독교적 정신과 생활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적인 기독교의 특색은 서양적인 것에 비해 퇴폐적이고 소극적이며 내세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점이 많았다.
이 같은 정신적 배경과 환경 밑에서 자랐고, 교육을 받은「미션」계 학생들의 기질은 자연히 얌전 제일주의로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미션」계 학교 설립 당시의 국내정세는 일제의 총독정치가 시작되고 한국민 말살을 위한 무단정치가 실시되던 시기인 만큼 일반국민들은 찍소리 한번 못하고 질식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미션」계통학교의 영미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이라는 특전을 향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인관리들도 그들에게는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미션」계 학생들이 보전학생들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환경 속에서 생활을 하여 얌전 제일주의, 무저항 도피주의로 흐르고 학구적 기풍이 저조했던 경향은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 같다.
선교사 자신들도 이들 학교 졸업생들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 평가하지 않아 당시「미션」 계 사립학교에서는「미션」계 학교 졸업생이 교사로 취임하면 초 임금을 30원 주었으나 관·공립계통 대학출신의 교사에게는 40원 이상을 지급했다.
이것은 수학연한의 차이에서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세계는 내세를 존중히 여기면서도 매우 현실적이며 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자못 투쟁적이어서 적극적으로 그들의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나아갔다.
그러나 불교·유교의 사상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생리 화 된 한국에 들어와서는 정치적으로는 무저항주의로, 경제적으로는 청 빈 사상으로, 사상적으로는 무기력한 도피주의로 변모했다고 보는 이가 많다.
1930년대의 숭 실의 경우 축구결승전에서 보전을 이겼을 때 보전선수 10여 명이 싸움을 걸어오자 1백여 명이나 되는 학생이 황급히 달아나는 무기력한 면을 노출했다고 김현승씨(숭 전 대 도서관장)는 얌전 제일주의의「미션」계 학교 학생기질을 회고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미션」계 학생들은 끈기와 주체성이 있어 내면적 저항의식을 키워 왔고 이것은 일단 유사시에 폭발, 다른 학생보다 앞장서서 결사적인 투쟁을 벌여 왔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기질은 숭 실 전문학교가 1938년 끝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폐교까지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은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겠다.
연 전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갈 때 교 모 대신 소위 개똥모자(「레닌」모자)를 즐겨 썼다. 당시 평양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인 숭 실 대학의 졸업식 때는 교장을 비롯하여 교수와 졸업생들이「가운」을 입고 개인마다 인력거를 타고 교문을 나서 수십 명이 장사진을 지어 거리를 통해 식장으로 갈 때에는 시민들이 온통 몰려나와 구경을 했다.
교장 이하 교수들의 학위 표시의「후드」가 형형색색의 빛깔로 바람에 나부끼는 것은 더욱 관중의 시선을 끌었다.
숭 실 대학은 1925년까지 16회에 걸쳐 1백 52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총독부는 아직 대학교육령이 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숭 실 전문학교문과로 개칭되었고 한국 민도 황 국 신민 이라 하여 종교인이나 종교학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문을 닫았다.
연 전 설립자인 원두우는 교육사업뿐 아니라 한국어문법과 한영자전을 편찬, 간행하였고 한국예수교서 회를 조직하고 기독교신문을 간행하여 한국 민의 계몽에도 어느 사람 못지 않은 공적을 남겨 그의 봉사활동은 당시 학생은 물론 일반국민의 귀감이 되었다.
원두우의 봉사활동은 1대에 그치지 않고 2세「언더우드」(한국 명 원한경)부처, 3세「언더우드」(한국 명 원일한)부처 등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인으로 연 전에 몸을 담고 민족교육에 헌신한 유억겸은 한말 개화운동의 선구자인 유길준의 2남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제대 법학 부를 졸업한 뒤 1923년에 연 전 교수로 부임, 학 감·부교 장 등 행정직을 맡아 오면서 한국인교수와 학생의 대변자 노릇을 해 왔다. 해방 후는 제5대 연 전 교장·문교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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