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검은 안경을 쓴 사나이가「넥타이」를 휘날리며 공항「램프」에 서 있다. 그 양옆엔 역시 검은 안경의 청년들이 서성거린다. 육중한「제트·엔진」의 군용비행기가 그들 뒤에 머물러 있다. 물론 영화는 아니다.
TV「뉴스」시간에 방영된 13일 정오 김포공항 일각의「클로스·업」이다. 그 검은 안경의 주인공은「데이비드·케네디」. 그는「닉슨」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의 섬유수입 제한에 따른 여러 나라와의 협상을 전담하고 있다.
그가 공항에서 서성거리는 동안「주리크」미국 측 대표는 한국정부와의 협상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15일 시한을 48시간 앞두고 한미섬유협상은 진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젠 협상이 아니라 『미국 측 안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만 남은 것 같다.
미국 측 일행은 이날 하오「케네디」특사와 함께 그 비행기의 기수를 들려 총총히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 「케네디」특사가 서울에 입성하지 않고 공항에서 시위(?)만 한 것은 유쾌한 인상은 아니다. 그는 마치 한미간의 섬유협상은「시그니처」(서명)만 남은 듯한 분위기를 과시해 보이려고 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가 할 일은 만년필을 움직이는 것이지 협상을 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하나의 「데먼스트레이션」을 해 보인 것이다. 미국정부의 성의가 어느 정도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섬유문제는 미국 측으로는 경제정책의 문제이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였던 것 같다.「닉슨」은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섬유업자들로부터 막대한 지지를 받은 것으로 소문나 있다. 이 사실은「닉슨」대통령과 그들과의 정치적 약속과도 상통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국에선 섬유업과 흑인들의 고용문제와도 상당한 관계가 있다. 목화밭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모습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미국섬유사의 위축은 흑인의 실업률을 올려 줄 것이다.
이런 사정들은 결국「닉슨」의 대통령 재선「캠페인」에도 영향을 준다.
따라서「아시아」제국과 미국과의 섬유협상은 처음부터 승부가 뚜렷한「게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케네디」특사가 지난번 서울서의 협상에서 보여준 독단과 소극성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결국 이번 섬유협상은 미국의 내국문제와 선린 국과의 우중에서 어느 것이 더 미국에 우선하느냐를 시험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지금 그 시험의 결과는 밝혀지고 있다.
이른바 다극화시대에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곤경을 해결해 줄 사람은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은 셈이다. 유일한 성과랄 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