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제자는 필자>(제20화)전문학교(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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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용익, 보전 설립>
세브란스의 학교에 이어 두 번 설립된 전문교육기관은 보성전문학교로 1905년에 개교했다.
전문학교란 이름이 붙은 것은 보전이 처음이다.
보전이 설립된 연대는 바로 일본인에 의해 을사보호조약 체결이 강요된 해여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보전이 민간인에 의해 설립되기까지의 동기와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세를 알 필요가 있다.
청일 전쟁 후 청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자 일본은 김홍집 내각에 강요하여 급격하고도 비현실적인 개혁을 연달아 단행하여 민심을 혼란케 했으며 배일감정이 극도에 달하자 이틈을 타서 러시아는 이범진 이윤용 등을 조종하여 아관파천사건을 일으키고 용암포를 불법 점령하여 군사기지를 구축하는 등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했다한다.
1904년2월 「로일」전쟁에 앞서 일본은 러시아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한일간 공수동맹을 전제로 하는 이른바 한일의정서를 맺음으로써 한국의 시정개선에 관해 충고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모든 군사행동과 토지의수용, 강점 등을 행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한일협정을 강요하여 학부 참 여관으로 「히데하라」를 임명함으로써 교육행정 전반에 걸친 일본의 간섭은 노골화했다.
지금까지 의병의 봉기로 일인과 친일분자를 실력으로 응징하는 등 직접적인 저항을 해오던 항일운동 방향은 일본의 침략행동이 노골화함에 따라 문화방면에 있어서의 저항으로 확대되고 심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게됐다.
일진회에 대한 천도교운동이나 관·공립학교에 대한 사립학교의 족출 등은 이러한 경향을 나타낸 것으로 이때부터 유명 무명의 사립학교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보전의 창설자인 이용익은 당시 궁내부내장원경으로 있으면서 한일의정서체결을 극력 반대했었다한다.
「로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평소부터 친아반 일파로 주목되던 이용익을 구금하여 일본으로 납치했는데 이것은 국내에서 반일운동을 못하게 한다는 동기이외에 일본의 선진문물을 시찰시킴으로써 일본의 국력을 인식케하여 포섭하려는 데도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로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1905년 1월 이용익의 귀국을 허락했다.
인간 이용익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각각 다른데 그는 함북 명천 태생으로 미천한 가문에서 자라났고 관인생활에 필요한 유교적 교양이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인 출세를 하여 왕실재산의 관리를 맡는 내자원경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 만큼 여러 가지 비난이 많았던 것은 당연한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당시 문벌이 있거나 유식을 자처하는 인물가운데는 친청파·친일파, 혹은 친아파 등으로 갈려서 매국행위를 자행하는 예가 많았으나 미천하고 배경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이용익은 오직 나라와 왕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일관했다고 말하고있다.
그는 일본인들의 여러 가지 고등술책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1년 동안의 일본체류생활은 그로 하여금 우리 나라도 하루 빨리 일본과 같은 신교육을 실시하고 신문학를 이룩함으로써 일본세력에 대항해야겠다는 생각만을 더욱 굳게 했다는 것이다.
이용익은 귀국 즉시 전문교육기관인 보전을 창설하게 됐고 1905년4월에는 제1회 학생모집광고를 황성신문에 내게되었다. 4월3일에는 전동(현 수송 동태고사자리)전 「로어」학교에서 역사적인 개교식을 가졌다.
당시의 동교 학칙 제2장3조에는『본교 내에 법률과·이재과·농학과·상학과·공학과를 분설하야 총히 본 방어로 교수 할 사』라고 5개 전문학과의 설치와 우리 나라 말의 사용을 규정하고있다.
시험과목은 내외국지지·역사·국한문독서·작문 및 산술 등이고 입학자격은 20세 이상이었으며 관공·사립학교의 보통과 이상 졸업증서를 가진 자이면 무시험으로 입학시켰다 한다. 학년은 2년제였는데 처음에는 법률 및 이재의 2과에만 응모자가 있었다.
이것으로 당시 전문학교의 수준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구학문의 가학교양은 있으면서도 신학문을 정규적으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 경향각지의 인재들에게 만학의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 입학자격을 까다롭게 하지 않고 시험문제도 쉽게 냈던 것 같다. 전임교수제도는 없었고 강사뿐이었고 초대교장에는 갑오경장 때 관비유학생으로 4년 동안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와 이용익의 위촉으로 설립업무를 전담한 신해영이 취임, 14명의 임원 및 강사로 출발했던 것이 오늘날의 고려대의 요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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