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 입은 인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미국의 텔리비젼 드라마 소재에도 유행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기 있던 전쟁 물이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그 반면 언제나 한결같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소재들도 있다. 서부극과 애정의 갈등을 다룬 작품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진범을 좇는 서스펜스와 추리의 드라마만은 항상 인기를 잃지 않고 있다.
서스펜스 드라마의 무대는 대개가 경찰서의 형사실과 법정이다. 얼마 전까지는 주로 형사 실이 무대였던 것이 요새는 법정으로 바뀐 것도 흥미롭다. 한 법학자는 그만큼 미국에서도 인권옹호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 텔리비젼에서 법정 드라마가 유행하는데는 더 깊은 까닭이 있다. 쫓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 사이에 페어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유력한 용의자가 수사망에 걸려 잡혔다 하자. 한국에서라면 모든 얘기는 여기서 끝나기 마련이지만, 미국에서는 오히려 여기서부터 더 재미있는 얘기가 펼쳐져 나간다.
법관의 선고에 의해 그가 진범으로 확정될 때까지, 그는 어디까지나 이노슨트(무죄)인 것이다. 설사 그가 살인혐의를 받은 중대한 범죄용의자라 해도 보석금만 내면 네활개를 펴고 거리를 나다닐 수 있다. 그것은 자기의 혐의를 벗기고, 자기 변호를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이래서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 측과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인 측과의 멋진 공방전이 벌어질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번 갇히기만 하면 그만이다. 『모든 피의자는 형이 확정되기까지는 무죄의 추정을 받는다』고 형사소송법에도 엄연히 적혀는 있다.
그럼에도 사실은 딴판이다. 피의자에게 자기변호의 기회를 주기는커녕 이들은 선고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무거운 멍에를 쓰고 마는 것이 상례이다. 하물며 인권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어제 본보 기사를 보면 여러 피의자들이 수갑이 채워진 채 오랏줄에 묶여 도심거리를, 끌려가고 있는 사진이 있다. 용수를 씌우던 일제 때만도 못하다는 느낌이다.
해방 후 우리 나라의 행형 제도에서 미결수에게서 용수를 벗기도록 한 것은 이들의 인권을 위한다는 갸륵한(?) 생각에서였다. 그 대신 창문을 가린 호송 차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나마 사람들의 눈을 가려 미결수들의 인권을 옹호한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나마의 눈가림도 못 해주는 것은 호송 차가 모자라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그게 진정한 이유는 못된다. 교도소의 붉은 담안 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범죄인들이라고 어느 미결수가 말했다. 이런 풍토에서는「인권옹호」라는 말 자체가 어쩌면 사치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