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채 사의 … 재계 'MB맨 물갈이' 본격화 가능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석채(68) KT 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검찰의 전방위 압박 수사에 결국 백기를 든 것이다. KT는 이 회장이 3일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고 사의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이날 전 임직원에게 보낸 e메일을 통해 “직원들의 고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솔로몬 왕 앞의 어머니 심정으로(퇴임)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후임 최고경영자(CEO)가 결정될 때까지 남은 과제를 처리하고, 후임 CEO가 새로운 환경에서 KT를 이끌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26일 ‘아프리카 혁신 정상회의’참석을 이유로 르완다로 출국했던 이 회장은 케냐를 방문한 뒤 2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앞서 지난 2월 참여연대는 배임 등의 혐의로 이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으며 지난달 22일 회사와 자택 등을 압수수색당하는 등 수사를 받아왔다.

 국내 최대 통신회사로 재계 순위 11위인 KT는 2008년 남중수 전 사장이 검찰 수사로 중도 낙마한 데 이어 또다시 대표이사가 불명예 퇴진하는 오명을 남기게 됐다.

 이 회장은 지난달 초부터 청와대로부터 사퇴를 종용받았다는 소문이 돌면서 거취를 놓고 논란이 계속돼 왔다. 당시 이 회장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검찰이 압수수색을 신호탄으로 본격 수사에 나서자 사임 압박이 본격화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검찰은 지난달 31일에도 광화문·서초·분당 KT사옥과 일부 임직원들의 주거지 등 8곳에 대해 또다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검찰 수사에 이어 이날 이석채 회장의 사퇴까지 이르게 된 단초는 시민단체의 고발이다. 참여연대는 올해 2월 KT가 스마트애드몰 등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백억원의 손해를 봤다며 이 회장을 배임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또 지난달에는 KT가 사옥 39곳을 헐값에 팔아 회사와 투자자에게 손해를 끼쳤다며 재차 고발장을 냈다. 이처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지만 이 회장은 아프리카로 예정된 출장을 강행하는 등 재임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뿐 아니라 임원들의 자택에까지 이례적으로 추가 압수수색이 진행되면서 회사 전체가 크게 동요하자 결국 마음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KT 핵심 임원은 “아프리카 출장 중 국내 수사 상황을 지켜보면서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안다”며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거취와 관련된 논란이 계속 제기되자 사의를 최종 결심했다”고 전했다.

 이 회장의 거취 여부와 상관없이 검찰 수사는 더욱 속도를 높일 전망이다.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부장 양호산)는 이 회장의 비자금 조성 수법을 포착해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최근 이 회장이 측근 임원들의 연봉을 높게 준 뒤 이 중 일부를 돌려받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을 포착해 수사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KT 공시자료에 따르면 사내 이사 3명은 2009년 취임 때 총 4억여원의 연봉을 받았으나 최근에는 20억원 이상으로 연봉이 대폭 올랐다.

 KT 소유 부동산을 헐값으로 매각해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는 고발 내용은 상당 부분 범죄혐의가 구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주변에선 “KT에서 조성된 비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돌고 있다. 이 회장은 그러나 이날 전 임직원에게 보낸 e메일을 통해 “(검찰에서 수사하고 있는) 의혹들이 해소될 수 있다면 본인 연봉도 숨김없이 공개할 것”이라며 배임을 비롯한 모든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수사팀은 이 회장을 소환해 조사할 계획이다.

 최근 국정감사에선 KT의 무궁화 위성 매각도 도마에 올랐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유승희(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KT는 이 회장이 재임 중이던 2010∼2011년 무궁화위성 2호·3호를 투자금액의 1% 수준에 불과한 45억원에 홍콩 기업에 매각했다. 게다가 인공위성은 대외무역법상 전략물자 수출허가 대상이기 때문에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 KT는 수명이 다한 위성을 팔아 수익을 창출한 것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석채 회장의 퇴임으로 KT처럼 공기업에서 민간기업으로 변신한 포스코 정준양 회장의 거취도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포스코 역시 현재 예고 없는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만큼 재계의 본격적인 ‘MB맨 물갈이’가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난 9월 박근혜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에 동행하는 경제사절단 명단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빠진 것을 두고 뒷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석채 회장, 정준양 회장은 둘 다 이명박 정권 초기 KT, 포스코의 CEO로 각각 취임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KT와 포스코는 단 1%의 정부 지분도 없는 완전한 민간기업이지만, 정권이 바뀌기만 하면 최고경영자 리스크가 되풀이되고 있다”며 “국가경제와 직결되는 통신과 철강산업의 대표기업인 만큼 충격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KT는 이석채 회장이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조만간 이사회를 열어 사표를 수리할 계획이다. 또 경영 공백이 장기화하지 않도록 이른 시일 안에 회장 추천위원회를 구성해 후임 회장 인선에 나설 예정이다.

심재우·손해용·심새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