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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유엔」군으이 총퇴각(7)「덩커크」의 흥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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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사막게 고지따라 강행군>
장진호일대에서 중공군 6개사단에 포위된 미 제1해병사단의 혈로타개전투상황을 전회에 이어 관계기록과 자료에서 간추려 보겠다. 장진호서 남방의 유담리에 있는 미해병 제7연대와 제5연대는 11월29일에 새로운 작명을 받았다. 포위망이 풀릴때까지 남쪽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작명에는 공격으로 돼 있지만 실은 후퇴하라는 것이었다. 해병대로서는 완전히 포위된 현여건에서는 공격보다 오히려 후퇴가 더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해병대 지휘관들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1월에 준장진급이 내정된 7연대장「호머·리젠버그」대령과 제5연대장「례이·머리」중령은 치밀한 철수계획을짰다. 두 연대장은 비좁은 산길 언덕에는 중공군이 그물을 쳐놓고 기다리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리첸버그」대령은『중공군은 우리가 고지를 이용하리라고는 예상치않고 도로만따라 후퇴하리라고 생각할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차량에만 의존해 이동하고 또 감히 야간전투같은것은 엄두도 못낸다고 생각할것이다. 이 점을 역이용하는것이다. 1개대대로 우리 주변 고지를 공격할까 하는데』라고「머리」중령의 의견을 구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합시다.』이런난경에 처했는데도 두연대장의 손발은 척척 맞아들었다.
영하 26도를 가리키는 강추위에「래이·데이비스」중령의 제7연대제1대대가 고지공격에 나섰다. 어느병사는 『중공놈들이 그빌어먹을 능선을 뛰어다닌다면, 우리라고 못할리는없지』라고 소리쳤다. 피곤·극심한추위·설사등에 시달린 대대원들은 온종일 싸우며 고지를 하나하나 넘었다. 밤이되자 대대장「데이비스」중령은 대윈들이 전투에 지치고 땀에젖어 만약 이대로 드러눕게된다면 모두 얼어죽을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거의 하룻밤내내 고지에서 고지로 대원들을 행군시켰다. 새벽녘에 재차 공격을 개시하여 22명으로 블어난 부상병을 운반하면서포위된「바버」중대와합류했다. 「바버」중대는 5일간 중공군의 중압을 받으면서도 진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손실을 입고있었다. 장교는 오직 중대장만이 살아있고 전사26명에다 부상 89명을 내고 중대전원이 동상과 이질에 걸려있었닥 「바버」중대의 뒤족과 좌우측에서는 「태풀리트」소령의 제5해병연대의 제3대대가 격전을 치르면서 통로를 지탱했다.
「데이비스」중령의 재1대대는 고지를 뛰어다니며 중공군의 배후를 난타하여 유담리에 있는 해병대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다시 이동하도록 했다. 유담리에선 중상자와 중환자만 차에 올라탔고 경상자들은 모두 걸어야했다.

<1개중대로 2개연대저지>
해병대는「지프」·대포·「트럭」등을모조리 가지고 이동했다. 피투성이가된 중상자들은 포신에 매달리거나 흑은 달구지위에 실려왔다. 그것은 보통 자동차의 행군이 아니었다. 깊숙이 고지를 장악하고있는 중공군에대한 전술적인 전투행군이었다. 미해병대는 다음의 세가지 이유로해서 사지에서 빠져나올수 있었다. 첫째로「데이비스」와 「태풀리트」의 두대대가 도로주변의 고지로 돌격하여 적을견제하였다. 대대윈들은 혹한속에 험준한 지형을 야간에 이리뛰고 저리뛰며 이동하면서 적을 교란시켰다.
해병들은 상상도 못할 악조건을 무릅쓰고 쉴새없이 고지의 적을 공격했던것이다. 그리고 제7연대 「바버」의 F중대도 6일간이나 중공군 2개연대의접근을 저지하여 그들이 포위망을 압축하지 못하도록 했다.
둘째는 함흥근처의 미해병제1비행대대소속 전투기와 항공모함「필리핀·시」호와 「레이테」호의 함재기와 공군수송기들이 주야로 해병대를 엄호했다.
해병대직속의 「코르세어」기들은 철수부대선봉 50「야드」가까이까지 접근하어 적에 기총소사와 폭격을가했다.
또한 산에 닿을만큼 서서히 비행하며 중공군이 집결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시간마다 철수하는 해병대의 머리위에는 우군의 비행기들이 새까맣게 떠있었다.
이비행기가 없었던들, 용빼는 재주가없는한 해병대는 장진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세째는 적장 송시윤이 모험을한 점이다. 그는 숫적으로 압도적인 병력을가지고 있었지만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전투준비를 갖춘 미해병대를 섬멸할만큼 충분한 장비나 화력을 가져오지못했다.

<주야로 하늘덮은 우군기>
송의 병사들은 14일동안 압록강을건너 산길을 달려 오느라고 보급부대와 포병대는 뒤에 처지게 되었다. 그리고 전투가 밤낮으로 계속되기 때문에 제아무리 단단한 중공군일지라도 지치지않을수가 없었다. 그들이 한국에 들어오기까지는 잘먹고 잘 입었지만 막상보급이 끊어지고보니, 굶주림과 질병으로 전의를 잃었다. 해병대가 하갈우리로 접근함에 따라 피로로 지친 중공군은 그들이 들어박힌 산봉우리에서 미공군기의 공격을 받고 달아나버렸다. 어떤 중공군은 무기룰 팽개치고 실성한듯 해병대를 멍하니 바라다 보기만했다.
철수개시 5일만인 12월4일에 2개미해병연대는 우군이 기다리고있는 하갈우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우군전선이 가까와지자 어느 해병은 노래를 불렀다. 해병들은 거의 몸을 지탱할수없이 지쳐있었다. 이질로 몸에서 악취가나는 병사, 손과 얼굴에 동상을 입은 병사, 굶어서 비틀거리는 병사등. 그러나 모두가 최후까지 온갖 노력을 다하여 해병답게 행동하였다. 유담리에서 빠져나온 해병과 하갈우리의 해병이 서로 악수했을때 모두 목을 놓아 울었다. 두연대는 유담리의 포위망으로부터6백명의 부상자를 모두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4「톤」급 「트럭」한대와 곡사포4문을 얼음구멍에 잃었을뿐 모든장비도 가지고 왔다.

<다시격전끝에 육군과합류>
그러나 이것은 미해병대가 제1차의호구를 빠져나은데 불과했다. 하갈우리로부터 9·5「마일」남방의 고토리까지 빠져나오는데도 6백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12월9일 장진호로부터 철수해온 해병선발대와 이들을 구출하기위해 북쪽으로 진격하던 미 제3보병사단은 정흥리북방 능선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여기서 육군과 합류한 미해병대는 함께 함흥으로 내려와 12일에는 목적지인 흥남에 도착했다.
미제1해병사단이 북한작전중에 입은피해는 전사 6백4, 전상사 1백14, 실종 1백92, 전상 3천5백4로서 도합 4천4백18명이었다. 이밖에 7천3백13명의 동상및 이질환자가 생겼으나 이들 대부분은 치료후 원대로 복귀하였다.
한편 이동안의 중공군손해는 전사1만5천, 부상 7천5백, 공중공격에의한 사상 1만5천으로 추산되고 있다. 부상자보다 전사자가 더 많은것은 부상자가 대부분 동사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은 점점 오므라들고 있는 흥남교두보를 원거리로 포위했지만 미군의 함포포격·총격때문에 대규모의 공격을가하지 못했다.
◆주요일지(51년1월26, 27, 28일)
※1월26일▲「유엔」군, 수원탈환 ▲이대통령, AP기자에 미의 대일강화정책지지언명
※1월27일▲한국해군, 인천에 4시간상륙 ▲「맥」원수 「덜레스」회담개시
※1월28일▲「유엔군, 서울 남방10「마일」지점도달▲장면총리 미서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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