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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궈' 한 북·중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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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

중국의 저명 철학자이자 수필가 장중싱(張中行) 선생은 생전에 쓴 수필 ‘결혼’에서 결혼을 네 개 등급으로 나눴다.

 얼마나 조화롭게 사느냐에 따라 ‘금실 좋음(커이·可意)’ ‘코드가 통함(커궈·可過)’ ‘참고 살 만함(커런·可認)’ ‘인내 불가(부커런·不可認)’로 분류했다.

 두 번째 등급의 커궈는 다 만족하고 사는 건 아니지만 정이 깊어져 떨어지기 어려운 관계를 일컫는다. 세 번째 커런은 각자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갈라설 수 없어 그냥 참고 사는 관계다. 부커런은 이혼하는 게 서로를 위해 낫다고 본다. 결혼의 등급은 직장·학교·군부대 등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변주돼 관계의 친소를 설명하는 틀로 인기를 끌었다.

 요즘 시진핑 지도부가 주변국 외교를 강조하면서 대외관계를 다루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결혼의 등급이 인기다. 국가 간 관계도 본질상 부부관계와 상통하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커이 등급은 러시아·몽골·파키스탄·스리랑카다. 전략적으로 이익이 두드러지는 윈윈관계다. 북한은 커궈, 한국은 학자들 성향과 이해관계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한데 대체로 커궈·커런 사이 어딘가로 수렴되는 것 같다. 부커런의 대상은 한창 우경화 질주 중인 일본이다.

 올해 들어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에 적극 동참하면서 북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북·중 관계는 ‘커궈’적 인식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일본 등 해양 세력의 대륙 진출을 차단하는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아무리 한·중 정상이 개인적 친분을 쌓고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기로 뜻을 모아도 북한이 어디로 이사 가지 않는 한 마지막 의사결정 순간엔 지정학적 손익 계산에 밀리게 돼 있다.

 베이징 외교가의 한 외교관은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제로로 만드는 유일한 길은 인민해방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뿐”이라고 한탄한다. 한국이 해양 세력의 북진을 막아주는 범퍼가 되면 북한의 전략 가치는 유명무실해진다는 논리다. 이렇게 남북 간 제로섬 게임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된다.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없고 불가능한 얘기다.

 국제적 대북 비핵화 압박 공조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미국이 뒷받침하면서 균열이 올 수 있다. 국제정치야말로 작용과 반작용의 현장 아닌가. 중국이 앉아서 대중 봉쇄를 당하고 있을 턱이 없다. 포위망을 뚫기 위해 동남아를 끌어들이는 데 혈안이 된 중국이 다시 그 지긋지긋한 북한 감싸기로 돌아서지 말란 법도 없다.

 대북 제재와 중국을 통한 설득과 압박에 올인하는 접근법은 이렇게 본질적으로 한계를 안고 있다. 북한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러시아·몽골·동남아 국가들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외교다운 외교가 절실한 순간이다.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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